유정현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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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현'''(柳廷顯, [[1355년]] ~ [[1426년]])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자는 여명(汝明)이고, 호는 월정(月亭)이다. 벼슬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본관은 [[문화 유씨|문화]]이다.<ref>[http://db아버지는 문화군(文化君)구(丘)이다.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NodeId=&bizName=KO&finId=025&gunchaId=av004&muncheId=01&seojiId=kc_ko_m011 <nowiki>海東雜錄[四] 本朝[四]</nowiki>柳廷顯]</ref>
 
고려 말에 음보로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전라도안렴사·장령(掌令)·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집의·좌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394년(태조 3)에 상주목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병조전서(兵曹典書)·완산부윤을 지내고, 1404년(태종 4)에 전라도관찰사·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 1409년에 판한성부사를 거쳐 1410년에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예조판서·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평양부윤·대사헌·이조판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병조판서·찬성사 등 요직을 거친 뒤 1416년에는 좌의정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는 삼군도통사에 임명되었고, 1424년에는 영돈녕부사 겸 판호조사(領敦寧府事兼判戶曹事)를 지낸 뒤 1426년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이로부터 4일 만에 죽었다.
 
그는 순탄한 관직생활을 보낸 인물이었다. 성품은 무척 과단성이 있고 또한 검소, 근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이치를 따지고, 옳은 일을 주장할 때에는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세자위를 폐할 때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나, 그는 먼저 현명한 이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에서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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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