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투 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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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투의 영토는 이르티쉬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또는 약튜빈스크,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히바)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차크 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인 [[사준사구#사구|제베]]와 [[사준사구#사구|수베에테이]]의 원정으로 얻은 땅을 포함하였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바투와 [[칭기스 칸]]의 다른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이 나타났다. [[우구데이 칸]]은 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렸다.
 
바투는 [[몽골]] 전승에는 '훌륭한 임금'이라 하나, 러시아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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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카간|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에[[1241년]]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귀위크 칸|귀위크]] 와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귀위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 에 올랐다.
 
귀위크의 즉위 이후 두 사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그 해에 귀위크가 사망하여 무산됐다. 그 이후 바투는 [[툴루이]] 의 왕비 [[소르칵타니]] 와 손 잡고 [[우구데이 칸|우구데이]]계 와의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 바투는 1251년에 [[쿠릴타이]]를 통하여 [[툴루이]]의 장남 [[몽케 칸|몽케]] 가 [[카간|대칸]]에 오르도록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