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게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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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러 나라의 참가가 이어지면서 회를 거듭하면서 참가국도 늘어나고 대회 규모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회원국들 사이의 정치적 대립으로 대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1962년 아시안 게임|제4회 대회]]에서는 [[아랍 세계|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출전을 반대하여 이스라엘은 참가하지 못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로 [[중화민국]]의 참가도 제한되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도 참가하지 못했으며, 이후로도 이스라엘과 중화민국 참가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었다. [[1966년]] [[타이|태국]] [[방콕]]에서 열린 [[1966년 아시안 게임|제5회 대회]]에 이스라엘과 중화민국이 참가하자 아랍 국가들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이스라엘은 [[1974년 아시안 게임|1974년 대회]]를 끝으로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아랍 국가들이 주도하여 아시아 경기 연맹에서 축출되어 [[유럽 올림픽 위원회]]로 옮겨 아시아 경기 대회 참가 자격을 완전히 상실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명칭 문제로 대립을 빚었던 중화민국은 후에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가입하여 참가하였다.
 
개최지 문제도 잡음이 계속되었는데, [[1970년]] [[1970년 아시안 게임|제6회 대회]]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마찰이 있었으며, [[1978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릴 예정이던 [[1978년 아시안 게임|제8회 대회]]는 [[인도]]·[[방글라데시]]와의 대립이 개최지 변경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결국 이들 두 대회는 아랍 산유국을 중심으로 한 재정 지원으로 [[타이]] [[방콕]]으로 개최지를 옮겨 열렸다.
 
이러한 혼란과 대립 속에서 [[1980년대]] 들어 아시아 경기 대회는 큰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대회를 발전을 위한 상설 기구로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를 창설하기로 합의하였고,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1982년 아시안 게임|제9회 대회]]를 끝으로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가 대회를 주관하게 되었다. [[1986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제10회 대회]]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불참하여 또다시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만은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는 등 대회는 양적·질적으로 더욱 성장하였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부산]]에서 열린 [[2002년 아시안 게임|제14회 대회]]대회와 [[인천]]에서 열리는 [[2014년 아시안 게임|제17회대회]]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