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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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력 7월, 여좌에서 출발해 어양에서 수자리를 지내기 위해 9백 명이 대택향에 둔쳤고, 진승은 같은 농민 출신인 [[오광]]과 함께 둔장(屯長)으로서 무리를 인솔했다. 마침 큰 비가 내려 나아가지 못해 기한을 지키지 못했는데,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참형에 처해지도록 되었다. 어차피 죽게 된 처지라 진승은 [[오광]](吳廣)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고, [[부소]]와 [[항연]]을 사칭하면 호응하는 사람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오광은 이에 동의하고 먼저 점을 쳤는데, 점치는 사람이 “일에 성공하여 공을 세울 것이나, 먼저 귀신에게 점을 치라.”라고 했다. 진승과 오광은 기뻐하고, 귀신에 대해 생각하다가 꾀를 내 상서로운 징조를 조작했다. 물고기 뱃속에 '진승왕'이라고 쓴 비단을 넣어 수졸들이 물고기를 먹다가 이를 봤고, 오광이 총사 곁에서 밤중에 [[여우]]인 체 하고 '대초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된다'라고 외쳤다. 수졸들은 점차 진승을 주목했다. 마침내 오광이 일어나 장위(將尉)<ref>둔병을 거느리는 직책.</ref>를 죽이자 진승도 도와 함께 두 장위를 죽였고, 수졸들에게 어차피 기한에 늦어 죽게 된 목숨이니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호소했다. 이때 진승이 한 말에서 “왕후장상이 씨가 있느냐?”라는 말이 유래했다.<ref name="s48"/>
 
무리들은 모두 진승에게 호응했다. 반란군은 나라 이름을 대초(大楚)라 하였으며 항연과 부소를 사칭하여 민중들의 마음을 얻었다. 단을 쌓고 맹세하고 장위들의 머리로 제사를 지냈으며, 진승은 장군을 일컫고 오광은 도위가 되었다. 대택향을 공격한 후 기(蘄)<ref>패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안후이 성]] [[쑤저우 시 (안후이 성)|쑤저우 시]] [[융차오 구]]에 있다.</ref>를 함락했으며, 부리 사람 [[갈영]]에게 기의 동쪽 지역을 평정하게 하고 자신은 질(銍)<ref>패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안후이 성]] [[쑤저우 시 (안후이 성)|쑤저우 시]] [[융차오 구]]에 있다.</ref>, 찬(酇)<ref>탕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허난 성]] [[상추 시]] [[융청 시]]에 있다.</ref>, 고(苦)<ref>진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허난 성]] [[저우커우 시]] [[루이 현]]에 있다.</ref>, 자(柘)<ref>진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허난 성]] [[상추 시]] [[저청 현]]에 있다.</ref>, 초(譙)<ref>탕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안후이 성]] [[보저우 시]] [[차오청 구]]에 있다.</ref>를 함락했다. 진(陳)<ref>진군의회양군의 속현으로 진군의회양군의 치소가 있으며, 지금의 [[허난 성]] [[저우커우 시]] [[화이양 현]]에 있다.</ref>에 이르렀을 때에는 무리가 불어나 병거가 6~7백 승, 기병 1천 기, 졸병 수만 명이 되어 진을 공격했다. 진수<ref>진의회양군의 군수. 진나라와 한나라에서는 군수를 군청 소재 현에 수를 붙여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ref>는 이미 달아났고 남은 수승의 저항을 분쇄하고 진을 점령하고서는 삼로와 호걸들을 불러모아 향후 계획을 의논했다. 삼로와 호걸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했다.<ref name="s48"/>
 
=== 수하들의 이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