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레오 4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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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Battle of Ostia.jpg|thumb|left|upright|1829년에 그려진 오스티아 해전도.]]
레오 4세는 언젠가 닥칠 사라센족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전을 포함한, 테베레 강 오른쪽 제방에 있는 교외를 둘러싼 성벽을 새로 보수해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레오 4세의 지시가 있기 전만 해도 로마는 외세의 침입에 전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남아 있는 레오 성벽을 쌓고 44개의 망루를 세워 경계를 강화하였으며, 출입구의 수를 3개로 제한하여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로부터 방어하였는데, 이리하여 ‘레오의 도시(Civitas Leoniana)’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는 로마 시 방어 외에도 과거 사라센족에게 약탈당해 황폐해진 성 베드로 대성전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을 복구하고 아름답게 꾸미는데 힘썼다. 특히 그는 제대를 거의 100kg에 가까운 금으로 재차 도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금속들을 곳곳에 장식하였다. 레오 4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복원한 데 이어, 기독교 왕국들에게 아랍의 침략자들에 맞설 것을 호소하였다.<ref>Pierre Riche, ''The Carolingians:A Family who forged Europe'', transl. Michael Idomir Alle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3), 175.</ref>
 
사라센족에 대항하기 위한 그의 적극적인 방법들은 [[프랑크 왕국]]의 보호 아래 교황권의 신장에서 잘 드러났다. 외적으로 레오 4세는 프랑크 왕국에 언제나 복종하였다. [[850년]] 그는 [[로타르 1세|황제 로타르]]의 요청으로 아들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2세|루트비히 2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루트비히 2세도 관습에 따라 교황의 의해 축성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레오 4세는 [[교황령]] 내의 행정적인 일을 부탁하였으나 독립적으로 추진한 일도 많았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직권 남용과 프랑크 왕국의 입김으로 불법적으로 임명되는 [[주교]]들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