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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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사 ==
[[File:British legation to Korea, c.1900.jpg|thumb|200px|주한 영국 공사관(1900년경) ]]
영국은 자국의 [[:en:HMS Providence (1791)|프로비던스호]]가 1797년(정조 21)에 원산 근해를 항해했던 것을 시작으로 1832년(순조 32)에는 로드 암허스트호(The Lord Amherst)가 충청도 홍천에 한달 정도 머물면서 통상 · 수호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 집정시(1863년~)에는 로나 호가 충청도와 경기도 연안에 나타나 통상 요구를 해왔고, 셔먼호는 평양에 와서 통상요구를 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184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에 상륙한 것이 영국인의 첫 방한(訪韓)이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년 음력 4월 6일 체결)과 동일한 내용으로 1882년 음력 4월 21일, 14개조의 조영 수호 통상 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것이 한일 수호통상장정과 상이하다는 이유로 비준을 보류하였다. 결국,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영국]]간 우호 통상 조약 및 부속장정이 조인되었다. 1884년 4월 4일,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en:Harry Smith Parkes|Harry Smith Parkes]])가 내한하여 비준서를 교환하고, 주한 영국 총영사로 상주하였다. 1885년 [[봄]],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의해 영국은 조선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 약화를 우려한 나머지 [[거문도]]를 [[조선]]과의 일절 협의도 없이 불법 점령하고 [[조선]]의 강력한 항의로 철수했다. 1900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공사관으로 격상되었다. 1901년 주영국 공사관이 개설되고 [[민영돈]] 초대 공사가 런던에 부임(1901년 7월)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1906년 공사관이 총영사관으로 격하되었다. 1910년 한일 합병 이후에도 총영사관은 계속 유지되었다. 광복 이전까지 아무런 통교도 하지 않다가, 1946년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재개설되었다. 1949년 1월 18일, 영국 정부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 미국, 중화민국에 이어 — <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서구 제국의 관계#한국전쟁 전의 서구 제국과의 관계|한국전쟁 전의 서구 제국과의 관계]]〉</ref>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한국-영국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1949년 3월 17일, 비비안 홀트(Vyvian Holt) 주한 영국 공사의 신임장이 제정되고, 주한 영국공사관이 설립되었다. 1949년 12월 31일, 초대 주영공사로 [[윤치창]]이 임명되고 1950년 2월 17일 공사관이 개설되었다. 1950년 6월 6일, 비비안 홀트가 주한 영국공사로 취임하였는데, [[한국 전쟁]] 때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영국은 [[한국전쟁]]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큰 규모의 [[UN]] 소속의 UN군을 파견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1953년 6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에 [[백두진]] 국무총리 서리 등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305210032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3-05-21&officeId=00032&pageNo=2&printNo=2159&publishType=00020 | 제목 = 英女王戴冠式參席 韓國特使一行決定 | 작성일자 = 1953-5-21| 출판사 = 경향신문 |인용문 = 오는 오월 二일에 거행되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전에 참석할 한국사절단일행은 다음과 같다 特別代表國務總理 白斗鎭 代表 國會議長 申翼熙 代表 駐英公使 李卯黙 隨員 國會議員 金東成 隨員 企劃處 豫算局 第二課長 李漢빈 그리고 대관식 후 六월 十四일부터 十七일까지 거행예정인 영국해군 관함식전에는 해군 총참모장 孫元一 중장이 부관원 元鍾赫 대위를 대동하고 참렬할 것이며 전기 사절단 일행은 일간 영국으로 향하여 출발하게 될 것이다 )}}</ref> [[한국 전쟁]] 후 영국 정부는 한국 재건을 위해 2,600만 달러를 제공하였다. 한 때 유엔결의로 북한과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물자 금수조치(物資禁輸措置)가 취해진 후 영국은 1957년 3월 4일 단독으로 대 중국금수의 일부 완화를 선언하게 되어 한국정부는 그것이 북한에 대한 이적행위라는 점에서 항의하는 사태가 생겼다. 이에 대해서 영국은 완화조치가 비전략물자(非戰略物資)에 한정된 것이라 밝히고, 유엔 한국문제·통일문제 등에서 계속 한국을 지지하였다. <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서구 제국의 관계#과도기의 서구 제국과의 관계|과도기의 서구 제국과의 관계]]〉</ref> 1957년 6월 13일, 한영 양국간에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기로 합의하였고, 1957년 6월 28일, 허버트 에반스(ubert J. Evans) 주한 영국공사가 초대공사로 승진하여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ref>{{웹 인용 |url = http://gbr.mofat.go.kr/kor/eu/gbr/legation/history/index.jsp |제목 = 한-영 양국 외교관계 발전사 | 출판사 = 주영국 대한민국 대사관}} </ref>1957년 주영국 초대 대사에 임명된 [[김용우 (1912년)|김용우]]가 10월 28일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710300032920101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7-10-30&officeId=00032&pageNo=1&printNo=3778&publishType=00020 |제목= 二十八日 着任 金用雨駐英大使 |출판사= [[경향신문]] | 작성일자 = 1957-10-30 |쪽=석간 1}} </ref> 1958년 5월 14일, 한국 정부는 돌연히 김용우 대사를 해임하였다. 그 이면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해양법회의에서 제시된 미국안(案)에 대하여 반대표를 던진 김용우 수석대표에 대한 문책이었다고 추측된다.(→[[김용우 (1912년)|김용우]] 참조) 김유택(金裕澤) 주영한국 대사는 1960년 1월 26일, 한국 전쟁 중에 봉사한 노르웨이 구급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귀중한 한국서적 및 한서적 한벌을 주영 노르웨이 대사관에 기증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12700209203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1-27&officeId=00020&pageNo=3&printNo=11618&publishType=00020| 제목 =우리書籍寄贈 | 작성일자 = 1960-1-27 | 출판사 = 동아일보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