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업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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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4월 27일의 새벽에 우리는 가까스로 시신들을 되찾았다. 우리는 내가 일찍이 마련해 둔 [[묘지]]에 그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었다. 나는 유럽식으로 그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값비싼 [[향수]]를 뿌리고 [[성유]]를 발라주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했고 그런 식으로 시신들을 입히는 것은 신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겨우 멍석으로 감쌌다. 지금 우리는 [[천국]]에 많은 보호자를 모셨다. 나는 [[조선]]에 종교의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며, 그 날이 오면, 이 시신들은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 시복 · 시성 ==
김업이 막달레나와 김아기 아가타 그리고 한아기 바르바라는 [[1925년]] [[7월 5일]]에 [[시복로마]]되었고, [[1984년]] [[5월베드로 6일광장]]에서 [[서울특별시교황]] [[여의도비오 광장11세]]에서 집전한 79위 [[교황시복|시복식]]을 통해 [[요한 바오로 2세복자]] 의해품에 [[시성]]되었다.올랐고,<ref name=blessed>{{뉴스 인용
| 제목 =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 url = http://www.pbc.co.kr/CMS/news/view_body.php?cid=520930&path=201407
| 출판사 = 평화방송
| 저자 = 이상도
| 날짜 = 2014-07-24
| 확인날짜 = 2014-10-12
}}</ref>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 이뤄진 103위 [[시성|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