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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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통일===
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자,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분열되었다.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떄,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무장(武將)이며, 동시에 정치가요 외교가인 [태조-왕건]은?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고성공하고, [[936년]]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
 
*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북진정책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援用)하려 하였다.
이에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북진정책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援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회유하는회유하였다. 한편~또한 통일 후 호족들과 통혼(通婚)하여,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과 타협 또는 연합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어, 그가 남긴~
그가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고 특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에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도 이러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조 왕건은 [[태조·정종의 북벌|북진책]]을 펴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경계하였으며,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西京, 평양) 개척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장군 유금필(庾黔弼)로 하여금 동북 지방을 수복케 하여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다.<ref >{{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성립/고려의 통일#고려의 통일〔槪說〕|고려의 통일〔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무장(武將)이며, 동시에 정치가요 외교가인 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936년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援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회유하였다. 또한 통일 후 호족들과 통혼(通婚)하여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과 타협 또는 연합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그가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고 특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에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도 이러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조 왕건은 북진책(北進策)을 펴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경계하였으며,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西京, 平壤) 개척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장군 유금필(庾黔弼)로 하여금 동북 지방을 수복케 하여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다.}}</ref>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였고,
특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에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도 이러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 한편 태조 왕건은 [[태조·정종의 북벌|북진책]]을 펴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였고, 거란을 경계하였으며,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西京, 평양) 개척에 노력하여, 장군 유금필(庾黔弼)로 하여금~
동북 지방을 수복케 하여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다.<ref >{{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성립/고려의 통일#고려의 통일〔槪說〕|고려의 통일〔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한편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게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전열(戰列)이 분열되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935년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무장(武將)이며, 동시에 정치가요 외교가인 태조는 이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936년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한 태조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여 영토를 넓히고, 신라가 지니는 전통적인 권위를 원용(援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하는 등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회유하였다. 또한 통일 후 호족들과 통혼(通婚)하여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들과 타협 또는 연합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러 호족들의 존재는 태조 왕건의 적지 않은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그가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고 특히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에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한 것도 이러한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태조 왕건은 북진책(北進策)을 펴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거란을 경계하였으며, 국토 수복과 신세력의 육성을 도모하여 서경(西京, 平壤) 개척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장군 유금필(庾黔弼)로 하여금 동북 지방을 수복케 하여 영토를 확장하도록 했다.}}</ref>
 
===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