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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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년]] [[10월 14일]] ~ [[1975년]] [[12월 4일]])는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이다. 종종 [[정치 철학자]]로 평가되지만, 아렌트 자신은 항상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그러한 호칭을 거절했다. 그는 대신에 자신을 정치 이론가로 묘사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업적이 "'한“‘한 인간'이인간’이 아닌 '인류'가‘인류’가 지구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는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생애 ==
아렌트는 당시 독립적이었던 린덴(지금은 [[하노버]]의 일부)에서 세속적 [[유대인]] 집안에 태어났으며 [[쾨니히스베르크]](이 도시는 그가 존경한 선구자 [[이마누엘 칸트]]의 고향이었다)와 [[베를린]]에서 자랐다. 그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마르틴 하이데거|하이데거]]의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그와 길고 산발적인 연애 관계에 있었는데, 이후 [[나치]]에 적극 협력하던 그에게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되어 그를 떠나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카를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입각하여 사랑의 개념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1929년에 출판되었으나, 아렌트는 1933년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 취득([[하빌리타치온]]; 독일에서의 교수 자격 취득)을 금지당했으며, 따라서 독일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도 좌절되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피신하여 [[파리 시]]로 갔다. 파리에서 그녀는 문학 평론가이며 [[카를 마르크스|마르크스]] 신비주의자인 [[발터 베냐민]]과 친구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아렌트는 유대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2차 대전|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한 뒤 [[독일]]이 프랑스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유대인들이유대인이 수용소에 강제 이송되게 되자, 아렌트는 프랑스에서 도주해야 했다. [[1940년]]에, 아렌트는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와블뤼허]]와 결혼했다. [[1941년]]에는 아렌트를 포함하여 2500명 정도 되는 유대계 망명자들에게망명자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발행해 준 미국 외교관 [[하이램 빙엄 4세의4세]]의 도움으로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 뒤 독일 출신 유대인 공동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주간 《[[아우프바우]]》(Aufbau)지에 기고했다.
 
2차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렌트는 [[마르틴 하이데거|하이데거]]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하이데거를 위해 증언했다. 이는 평소 하이데거를 깊이 존경하던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일 그녀가 하이데거의 정부로 대학시절부터대학 시절부터 불륜 불륜관계였기관계였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비록 그가 나치에 협조하였다는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그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 그녀가 증언했다는것도증언했다는 것도 거짓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50년]]에 그녀는 미국 귀화 시민(naturalized citizen)이 되었으며, 1959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완전한전임 교수직에 지명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 성과 ==
아렌트의 업적은 [[권력]](power)의 속성과,속성 및 [[정치]], [[권위]](authority), 그리고 [[전체주의]]와 같은 주제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업적의 상당한 부분은 집단적 정치 행동과 같은 의미로서의 자유의 개념을 긍정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자유는“자유는 정치가 끝나는 데서 시작한다"는시작한다”는 자유주의의 가정에 대항하여, 아렌트는 자유를 공적이고 연합적인 것으로 이론화하였으며,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리스의 폴리스와, 미국 군구(township), [[파리 코뮌]]과 시민권 운동들(특히 1960년대의[[1960년대]]의)의 예를 들었다. 《[[뉴요커 (잡지)|뉴요커]]》에 낸 그의 [[아돌프 아이히만|아이히만]] 공판에 대한 보고서(나중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발전하게 된다)에서 그는 [[악]]이 근본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악의 평범성|진부함]](banality;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활동이나 비(非)활동이 낳을 결과에 대한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다수의견에다수 의견에 따르려 하는 경향)의 작용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생각없음(thoughtlessness)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는 철저히 파편화되고 소외된 개인들과 그들의 수동적이고 마치 죽어 있는 듯하며 '생각없이'‘생각없이’ 모든 것을 안이하게 수용하는 생활에 던져진 강렬한 메시지로 작용하였다.
 
그는 또한 《[[전체주의의 기원]]》도 집필했는데, 여기서 그는 [[공산주의]]와 [[나치즘|나치주의]]의 뿌리와 그들의 [[반유대주의]]와의 연관성을 추적하였다. 이 책은 어떤 사람들은 모순된 것으로 믿는 두 주제를 비교한 까닭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나 아렌트는 1975년에 사망하여, 남편이 오랫동안 강의한 뉴욕주 허드슨 강 유역 애넌데일(Annandale-on-Hudson, New York)에 있는 [[바드 대학]]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