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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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3세는 재임 초반에는 진지하게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기를 원했지만, 그가 교황직을 맡은 5년 동안 실제로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었다. 1551년 카를 5세 황제의 요청에 따라,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고 파르마 공작 및 프랑스의 [[앙리 2세]] 국왕에 맞선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황제의 적들과 다시 친분을 맺었으며 1553년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을 연기하였다.<ref>Richard P. McBrien, 283–284.</ref>
 
율리오 3세는 점차 이탈리아 정치에 만족하면서 [[포폴로 문]] 인근에 자신을 위해 지은 호화로운 궁전인 [[빌라 줄리아]]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빌라 줄리아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내며, 가끔씩 교회 개혁 위원회를 다시 세우는 등 교회를 개혁하는데 소심한 노력을 보이곤 하였다. [[예수회]]와 절친한 관계였던 그는 1550년 예수회의 헌장을 인가하고, 1552년 8월 31일 [[교황 교서]] 《Dum sollicita》를 발표하여 예수회 신학교인 [[콜레제움콜레지움 제르마니쿰]](Collegium Germanicum)의 설립을 승인해 주었다.<ref>Oskar Garstein, ''Rome and the Counter-Reformation in Scandinavia'', (BRILL, 1992), 105.</ref>
 
그가 재임한 시기에 잉글랜드는 1553년 [[메리 1세]] 여왕이 즉위하면서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하였다. 이에 율리오 3세는 [[레지널드 폴]]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하면서, 그에게 잉글랜드인들이 다시 가톨릭 신앙에 충실할 수 있게 잉글랜드 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재량껏 활동하도록 전권을 부여하였다.<ref>Richard P. McBrien, 284.</ref> 1555년 2월 잉글랜드 의회에서 교황에게 공식적인 항복을 선언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지만, 특사가 로마에 당도하기도 전에 교황이 선종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