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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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명의 프랑스인 사제 [[피에르 모방]] 신부와 [[자크오노레 샤스탕]] 신부를 만났다. 그들은 그 기이하고 낯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매우 열심히 일했다. [[1836년]]에 최초의 [[프랑스인]] [[선교사]] 모방 신부가 조선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국내의 [[천주교]] 신자의 수는 약 6천 명이었고 [[1839년]]에는 약 9천 명에 달했다.
 
그를 비롯하여 [[피에르 모방|모방]] 신부와 [[자크오노레 샤스탕|샤스탕]] 신부 이렇게 세 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의 존재는 [[조선]]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박해를 피해 [[손경서 안드레아]]의 도움으로 [[경기도]] [[수원]]에 있는 그의 집에 숨어서도 [[천주교]]의 전도 활동과 교세 확장에 힘쓰던 앵베르 주교는 [[김여상]]의 배신으로 [[1839년]] [[8월 10일]]에 밀고를 당했다. 김여상은 관리들과 짜고 포도대를 꾸려놓고는 한 순진한 천주교인 농부를 현혹해서 관리들이 천주교를 허락하여허락하였고 고위 관리들까지도 입교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한양]]으로 가서 그분들을 개종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 농부는 교우들과 함께 포졸들 보다 먼저 앵베르 주교를 찾아가서 김여상에게 들은 이야기를 말했지만말했는데, 앵베르 주교는 그것이 잘못된 정보인줄을 알면서도 그 교우들을 위해 자수를 결심했다. 또한 그는 체포당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시간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미사]]를 올린 뒤 그를 기다리던 관리들에게 가서 자수했다. 그는 [[한양]]으로 보내져 해외 선교의 거처를 알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모든 해외 선교사들이 행방을 드러내면 [[개종]]한 신자들이 용서받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동료 [[천주교]] 신부인 [[피에르 모방]] 신부와 [[자크오노레 샤스탕]] 신부에게 조선 관가로 가서 자현할 것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인용문2|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좋은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