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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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에는 [[송병준]] 계열의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제4대 사장에 임명되었다. 일진회 기관지 격인 국민신보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촉구하는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을 지원하는 논설을 실어 《[[대한매일신보]]》로부터 '난적배'로 지칭되던 친일 매체였다.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이때 송병준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한석진]]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최익현]]의 7촌 조카를 자처하는 최영년을 사장에 앉혔으며, 한학에 밝고 글재주가 뛰어난 최영년이 각 기관에 보내는 합방 청원 취지의 글을 도말아 작성하여 '침 뱉으며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만큼 많은 비난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최영년은 국민신보 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일진회 정견협정위원을 지내고 [[이토 히로부미]] 추도를 위한 단체에 참가했으며, 일진회의 건의서 작성에도 가담했다. [[1910년]]에는 [[이용구]] 계열의 친일단체인 [[대한상무조합]] 본부장에 임명되었고, [[1912년]] 한일 합방에 세운 공을 인정 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1917년]] 《조선문예》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 [[메이지 천황]] 부인인 [[하루코]]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 이 잡지에 싣는 등 문필을 이용한 친일 활동을 계속했다. 일본의 통치가 시작된 뒤 '문명의 기상이 증진하고 승평의 광휘가 발양되었다'고 평가하거나 [[요순]] 시대에 비유하는 등 일제 통치를 찬양하는 글을 비롯하여, 일제 하의 조선 민중을 '태평성대 태평한 사람들'로 묘사한 한시를 창작해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