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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상투는 어릴 때에는 댕기를 드리다가 장가를 가면 머리카락을 끌어 올려서 정수리 부분에서 감아 매던 머리형으로 중국의 《[[사기]]》(史記)에 위만(衛滿)이 조선에 들어올 때 ‘추결(魋結)’을 하고 왔다는 기록과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괴두노계(魁頭露紒)’, 즉 관모를 쓰지 않는 날상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상투의 역사가 매우 오램을 알 수 있으며, 그 확실한 모습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나는 상투의 모양은 커다랗고 둥근 것, 작고 둥근 것, 쌍상투[雙髻]가 있는데, 큰 상투는 관모를 쓰지 않은 장사도(壯士圖)나 역사상(力士像)에 많고, 작은 상투는 관모를 쓰는 귀인층에서 볼 수 있다.
 
신라에[[신라]]에 있어서도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도기로 만들어진 기마인물에 상투가 잘 나타나고 있다. 백제에서는[[백제]]에서는 아직 뚜렷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지만, 삼국 공통의 풍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는 《[[고려도경]]》에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冠)·건(巾)·복두(幞頭)를 썼다.”는 기록과 ‘속발(束髮)’의 기록이 보인다.
 
이들 관모는 모두 상투 위에 쓰기에 적합한 모양이며, 속발도 상투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78년(충렬왕 4) 왕의 명에 의하여 모든 관료층에서는 정수리부분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 내린 몽고식 개체변발을 하였다.
 
공민왕의 복구적인 중흥정책 이후에는 다시 상투를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는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 상투, 한국학중앙연구원</ref><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221414411&code=96020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개미허리, 긴 머리를 탐한 까닭은] 경향신문(2013.10.22) 기사 참조</ref>
 
== 한민족과 상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