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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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화흠은 독행의 군자가 천거되자, 화흠은 자신의 벗인 [[관녕]](管寧)을 소개하였다. 이에 문제는 차를 준비해 관녕을 맞아들이려고 하였으나, 관녕은 요동(遼東)에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임관을 거절하였다.
[[226년]], 문제가 죽고 그의 아들 [[조예]](曹叡)가 그 뒤를 잇자 박평후(博平侯)에 봉해져, 500호의 기증을 받아 1300호를 다스리게 되어 태위(太尉)에 옮겨지게 되었다. 이 무렵에 화흠은 노령을 이유로 태위직을 친구인 관녕에게 양도하고 은거하고 싶다고 탄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산기상사산기상시(散騎常) [[무습]](繆襲)을 파견해 강한 어조로 출사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화흠은 어쩔 수 없이 출사하였다.
[[230년]], [[조진]](曹眞)이 자오가도(子午街道)를 통해 [[촉한]](蜀漢)을 침공하자 명제(조예)가 허창(許昌)에서 행차했지만, 화흠은 천명을 기다려야 한다며 「비전론」을 주장하였다. 이때 명제는 자신의 천명을 함부로 무력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해 화흠의 충고를 감사의 뜻을 보였다. 결국 여름에 폭우가 내렸기 때문에 조칙에 의해 조진군은 퇴각하였다.
[[231년]], 향년 75세로 병사하였다. 이때 시호를 경후(敬候)라는 시호를 받아, 아들 [[화표 (사람서진)|화표]](華表)가 그의 뒤를 계승하였다.
 
=== 그 후 ===
그 후, 화흠의 자손들은 위와 [[서진|진]](晉) 두 왕조 시대에 활약하였다. 또한 화흠의 손자인 [[화교 (사람서진)|화교]](華嶠)는 후한의 역사를 모은 『한서(漢書)』를 저술하였다.
 
== 《삼국지연의》에서의 화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