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 (1884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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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송달한 자금의 액수가 얼마만큼 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나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경영하던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가 1백여만원의 부채를 지고 파산될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
 
[[1918년]] 봄 [[김성수 (1891년)|인촌 김성수]]는 [[경상북도]] [[경주시|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ref name="최준1">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전진문 지음 | 황금가지 | 2007) 182쪽</ref> [[김성수 (1891년)|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ref name="최준1"/> 김성수가 [[경상북도|경북]] [[경주시|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김성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ref name="최준1"/> 최준은 [[김성수 (1891년)|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닭았다깨달았다 한다.
 
한편 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