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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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빠져나간 23명의 684부대원들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인천시내버스(현대 R-192)를 탈취하여 [[청와대]] 방향으로 향하였다. [[인천]]에서 육군과의 총격전으로 타이어가 터져서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수원]]-[[인천]]간 시외버스(신진 FB100L, [[태화상운]] 소속)를 다시 탈취하여 14시 15분경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서울)|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부대원 대부분이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목숨을 끊었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부대의 진상을 은폐하였고, 이후 이 사건은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진 채 30여 년간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99년]]에 [[684부대]]의 실상을 파헤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3년]] 말 [[실미도 (영화)|동명영화]]가 개봉하면서 사건의 실상이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2004년]] [[2월]]에 [[대한민국 국방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서 [[1968년]] [[3월]] 한꺼번에 [[행방불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ref>[http://media.daum.net/entertain/star/newsview?newsid=20040216112411764 "충북 옥천 실종자 7명, 실미도로 끌려가"] 연합뉴스, 2004.2.16</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