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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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금도 류(유) 劉 ==
=== 한국 ===
한국의 '류/유'(劉, 刘)씨는 2000년 기준 242,889명으로, 대한민국 성씨 순위는 32위이다. 한나라 왕자들이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한반도로 도망치는 사례가 있었으며, 유헌(劉憲)은 낙랑 지역 태수을 지냈다. 서기 120년경 유헌(劉憲)은 낙랑태수였는데 왕조에게 피살된 기록이 전한다. '''유인원'''(劉仁願)와 '''유인궤'''(劉仁軌)는 [[당나라]] 나당연합군의 무장으로 참가했다. 현재 한국 유(류:劉)씨의 주류는 [[강릉 유씨]], 거창유씨[[거창 유씨]]이고, 시조는 [[유전 (1051년)|유전]](劉筌)인데, 송나라 병부상서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기록이 불분명하여 정확한 고증은 아니다. [[황해도]] 호족 가운데 유(류:劉)씨가 있었다고 전하며, 고려 [[왕건]]의 태후 [[신명순성왕후]]의 성은 유씨(류:劉氏), 본관은 충주(忠州)로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다. 유긍달(劉兢達)의 선조는 전하지 않으나, 왕건과의 교우 관계 등의 요소 때문에 한반도 토착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의하면 현재 한국 유(劉)씨의 대종인 [[거창 유씨]]나, 고려 때 왕후를 많이 배출한 [[충주 유씨]]는 모두 토성(土姓) 곧, 한반도 토착계로 나와 있다. 이런 저런 연후로 봤을 때 한국 유(劉)씨는 대부분이 한반도 토착계로 보인다.<ref>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 </ref> 류/유(劉)씨 역시 본음이 '류'이나 두음법칙에 따라 '유'로 쓴다.<ref>http://hanja.naver.com/hanja?q=%EF%A7%87</ref>
 
'''[[강릉 유씨]]'''(江陵 劉氏)의 시조 '''유전'''(劉荃)은 [[송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고 한다. 『을묘보(乙卯譜)』 서문에는 유전이 한태조(漢太祖) 고황제(高皇帝)의 40세손으로 왕안석(王安石)에게 간언하다가 고려 문종 때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영일군(迎日郡)에 터를 잡은 후로 경상도에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유씨(劉氏)는 거창(巨昌), 강릉(江陵), 배천(白川)을 관향으로 삼아 분적이 되었다. 이후 유전의 12세손 유창(劉敞)이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옥성은 강릉의 옛 이름이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아 강릉을 본관으로 하고 있음이 『거창구보(居昌舊譜)』 서문에 실려 있다.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의하면 유창(劉敞)은 초명이 유경(劉敬)으로 1371년(공민왕 20) 신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강릉 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69_018_0298|강릉 유씨}}</ref>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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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兪)씨는 2000년 기준 178,209명으로,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35위이다.
 
* '''[[기계 유씨]]'''(杞溪 兪氏)의 시조는 [[신라]] 6관등 아찬을 지낸 [[유삼재]](兪三宰)이다.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 멸망 후 고려 왕조에 불복하자, [[고려 태조]] 왕건이 그를 기계현(杞溪縣) 호장(戶長)으로 강등시킨 이후로 후손들이 기계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기계 유씨]]는 [[고려]]시대에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으나,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89명을90명을 배출하였다. 인구는 2000년 기준 113,430명이다.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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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庾)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6,80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03위이다. 본관은 [[평산 유씨|평산]], [[무송 유씨|무송]] 2본이다.
 
'''[[평산 유씨]]'''(平山 庾氏)의 시조 '''[[유금필]]'''(庾黔弼)은 평주(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 출신으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통합삼한익찬공신(三重大匡統合三韓翊贊公臣)에 봉해졌다. [[유금필]]의 5세손 유녹숭(庾祿崇)이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자 [[무송 유씨]]로 분적하였다. 고려시대 명성을 떨쳤으나,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72_189_0300|무송 유씨}}</ref>
 
=== 중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