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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정도정]], [[정응]], [[정손위]]
|중시조=
|인물 = [[정충신]], [[정인지]], [[정상기]], [[정현조]],[[정주영]], [[정몽구]], [[정몽준]], [[정몽헌]]
|년도=2000
|인구=158,396
 
== 인물 ==
* [[정충신]](鄭忠信, 1576년 ~ 1636년) : [[전라도]] 나주 출신의 노비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을 따라 종군하다가, 16세의 나이에 왜군의 포위를 뚫고 의주까지 가서 권율의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러한 의기를 기려 백사 이항복이 그에게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조선 선조]]는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주었다고 한다. 이후 무과에 급제한 뒤 1621년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수비하고, 1623년 안주목사 겸 바어사가 되었다. 이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자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고, 곧 풀려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본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천시받는 노비의 신분에서 만인의 추앙을 받는 위인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ref>[http://people.aks.ac.kr/front/board/person/viewPersonStatus.aks?bbsCode=55&isEQ 노비에서 최고 무신이 된 정충신]</ref>
*[[정초 (조선)|정초]]
*[[정인지]]
|}
 
== 참고 자료주석 ==
<refer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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