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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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아버지는 관아의 아전으로 중인이라 할 수 있는데, 노비였던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서 신분이 정해지는 노비종모법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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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576년 전라도 나주에서 부친 정륜과 모친 [[영천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전라도]] 나주의 [[노비]] 출신이다.(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윤(綸)이고, 어머니는 노비 신분이라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에 따라서 노비가 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에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하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여 권율의 신임을 받았으며 적지를 정찰하고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권율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에 갔다가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면서 무관의 길을 걷게되었다. 이항복이 그에게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조선 선조]] 임금은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주었다.<ref>[http://people.aks.ac.kr/front/board/person/viewPersonStatus.aks?bbsCode=55&isEQ 노비에서 최고 무신이 된 정충신]</ref> 정충신은 이항복의 집에 머물면서 학업을 익혔고 그해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608년 조산보만호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고 1618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스승인 이항복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동행했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이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나자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그가 다시 등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