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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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의 지배층은 청에 대한 적대감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에 청나라를 쳐서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었던 효종은 심양에서 겪은 인질로서 고초와 굴욕을 분히 여겨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상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과 함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축(修築)하고 군대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청이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대중국(對中國) 지배를 공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였으므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조선으로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청과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여 경제상ㆍ문화상 자주 교류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청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여 적극으로 수용하였고 이 무렵, 러시아가 침략해오자 청은 이를 격퇴하려고 조선에 원병을 명하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나선정벌]]).
==병자호란 당시 인신매매가 성행하던 이유==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침공한 청군은 조선군포로는 물론 민간인들도 마구 납치하여 청나라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청나라에 팔려간 조선인포로들은 주로 당시 청나라본토이던 만주에서 인신매매되었다.
 
당시 병자호란이 청나라의 승전으로 종전되어 조선은 자국민포로에 대한 발언권이 없었다.
 
이들을 조선으로 송환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일정한 몸값을 지불해야 되었다.
 
하지만 포로들 대부분이 포로가 되기 전 몸값을 지불할 경제력이 안되는 데다가 조선 조정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아 일부 부유한 포로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송환된 것과 달리 대부분의 포로들은 송환되지 못하고 청나라에서 노예로 살게 된다.
 
국방이 약하면 자국의 국민들이 인신매매의 희생양 되는 것을 알려주는 교훈을 준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