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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표준어|북한}}, 北韓)은 [[동아시아]]의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평양직할시]]이다. 남쪽으로는 [[한반도 군사 분계선|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대한민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으며 폭 4[[km]] 정도의 [[한반도 비무장 지대|비무장 지대]]가 완충 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백두산]], [[두만강]]을 경계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접하며 두만강 하류에서 [[러시아]]와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에 속한다. 공용어는 [[한국어]]로, [[서북 방언]]에 기초한 [[문화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는 [[북위 38도]]를 경계로 하여 남쪽에는 [[미국]], 북쪽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군정이 실시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군정 아래에서 [[1946년]] 2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48년]]에는 [[국제 연합]] 감독하의 한반도 총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김일성]]을 수상(나중에 주석이 됨), [[박헌영]]·[[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를 수립했다.<ref> {{서적 인용 |저자=김재영 외|제목=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꺾쇠표=예|발행일자=2001-04-02|판=초판 2쇄|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 89-88410-37-8-03910|쪽=321~322}}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ref>
 
[[조선로동당]], [[천도교청우당]], [[조선사회민주당]]이 있는 형식상의 다당제 체제이지만, 사실상 [[조선로동당]]의 일당체제이며, 특히 국가주석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 그리고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이 차례로 옹립되었다는 점 때문에 일부 정치학자들에 의해 사실상 봉건 세습형 독재 체제라고 평가가 되기도한다.<ref>[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52011175050621 선진당 "北, 단호한 응징"‎] 2010년 5월 14일 《아시아경제》</ref>. 20세기 이후의 공화제 국가에서 지도자의 3대에 걸쳐 독재권력이 세습된 경우는 이 나라가 최초이라는 주장도 있다{{출처}}. 현재 내세우는 정치이념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先軍政治·군이 앞장서는 정치)이다. 주체사상은 [[1972년]] 공산주의헌법 개정에서 최초로 등장하였고, [[1992년]] 4월 헌법 개정 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1998년]] 공산주의헌법 개정 때 [[공산주의]] 문구를 전부 삭제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국방위원장이 북한의 실권자임을 명시하였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89798 [소사이어티] 북한 헌법, 후계체제의 청사진, 2006.2.5.</ref> [[2013년]] 6월에는 헌법이나 노동당 규약보다 상위 규범인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39년 만에 개정하면서 [[공산주의]] 강령을 삭제하고 주체혁명으로 대체하였으며, 김씨 일가의 '백두 혈통' 계승을 명문화하였다.<ref>북한, 공산주의 폐기…왕조 선언 [http://m.pressbyple.com/articleView.html?idxno=25317]</ref>
 
== 국명 ==
정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나 줄여서 '''조선'''으로도 부르며, [[대한민국]]을 일컫는 용어인 남조선(南朝鮮)과 대비하여 '''북조선'''(北朝鮮)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중화민국]], [[미국]] 등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립관계 혹은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에서는 '''북한'''(北韓, North Korea)이라고도 부르나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이 명칭이 한반도의 분단체계를 고착화시키는 발상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고 있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919011021 인천AG 기간 김정은 호칭 ‘귀측 윗분’으로 불러 달라 ], 서울신문, 2014년 9월 19일</ref>
 
== 역사 ==
{{본문|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
{{참고|한국의 역사}}
=== 고조선에서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 ===
=== 해방 직후 ===
{{참고|북조선인민위원회}}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 [[북위 38도#삼팔선|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했다. 이 때 [[조만식]]을 중추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평남건국준비위원회]](平南建準委)를 세우자 평안남북도(平安南北道)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군정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적화(赤化)의 거점이 되었다. [[1945년]] 10월 한반도 북부에서는 [[이북5도행정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실제 경작민에게 배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하였다. 그 뒤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세워졌다. 이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신민당]]이 연합하여 [[북조선로동당]]을 만들고, 이후 [[남조선로동당]]과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된다. 이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9월 9일]] 인민 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고<ref>
한편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북5도위원회]]를 따로 두어 행정적 업무를 수행한다. 정부 차원의 외교 업무는 [[대한민국 통일부]]에서 관할한다.</ref>,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수상]]에 취임했다. [[1948년]] 12월 [[국제 연합]]으로부터 승인 받은 [[대한민국]]과 달리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였으나,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 및 공산권 국가들은 승인하였다.
 
=== 6.25 전쟁 ===
[[파일:SeoulWarDamage2.jpg|thumb|left|230px|6·25 한국 전쟁 - 폐허에서 구조 화물을 뒤지는 여인]]
{{본문|한국 전쟁}}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 되었으며 [[38도선]] 인근 전역에 걸쳐 국지전이 빈발했다. 특히 [[인민군]]은 옹진 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부근을 주 공격 목표 지역으로 삼았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허락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한다.
 
[[파일:6.25 전쟁 시 한복 여성.jpg|right|thumb|180px|[[한국 전쟁]] 당시 입대하는 장정을 마중나온 여성 (대구)]]
 
전쟁 초기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는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를 정하고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점령했다. UN군의 파병 지원과 [[더글라스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이 반격을 시작하여 [[9월 27일]]에 [[서울]]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 한국과 UN군은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까지 진출하지만 중공군의 불법 개입과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위기를 극복하며 장기화되었다. 이후 한반도 중부에서 교착을 거듭하던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대한민국과 북측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독재의 시작 ===
[[파일:Kim_Il_Sung_Portrait-2.jpg|thumb|left|140px|[[김일성]]]]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구조는 초기에 [[남로당]] 계열, 갑산파 계열, [[소련파 (공산주의 운동)|소련파]] 계열, [[연안파 (공산주의 운동)|연안파]] 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 체제였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였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은 대거 숙청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의 지반은 계속 확대되었다. [[1956년]] 8월에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던 김일성을 끌어내리려던 시도(8월 종파 사건)를 하였지만, 무산되면서 얼마 후 주동세력인 소련파와 연안파는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어서 김일성은 갑산파계열내에 온건세력들을 숙청함으로써, 정치구도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확립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은 [[1977년]] 개정되어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확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
*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주적인 공산주의 국가"로 규정해 혁명의 단계가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 공산주의 혁명단계로 넘어왔음을 명확히 했다.
*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部, 수도)는 서울시다"라는 내용에서 '서울'을 '평양'으로 바꾸었다.
*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 명시
* 공산주의적 소유제도의 확립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공산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래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제와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에 가미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하였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산주의헌법의 요지이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ref>김당택, 《우리 한국사 (정치사 중심의 새로운 한국 통사)》, 푸른역사, 501쪽</ref>
 
김일성은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하였으나,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성취되지 못하였다.
[[2000년]] [[6월 13일]]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과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같은 남북 협력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이 발생하였다. 한편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6년]] 7월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사일 발사 사건|미사일 시험발사]]가 있었으며 [[10월 13일]]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직할시]]에서 만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한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수립된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 관계는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2008년 5월 대한민국 국적의 금강산 관광객이 관광 도중 살해되었고, 결국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에는 이른바 [[광명성 2호]]를 발사하였고, 5월에는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핵실험]]을 강행하였다. 또한 2010년 3월 26일 조선민주주의씨발공화국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천안함 침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연이어 11월에는 휴전협정 이후 최초의 영토 도발인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여 남북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 [[김정은]] 정권과 3대 권력 세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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