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반도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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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제 17연대]]는 45km에 달하는 광정면에 2개 대대를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예비로 한 전형적인 방어형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ref name="전쟁 기념관">[http://ki.warmemo.co.kr:8101/warmemo/jsp/data/view.jsp?type=1&pkey=625CB00001 한국 전쟁 기념관]</ref>
 
조선인민군은 [[6월 25일]] 04:00부터 30분 동안 전에 없던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을 국군 방어지대에 집중한 후, 기마대를 앞세운 조선인민군은 [[태탄군]]~[[옹진군 (인천광역시황해남도)|옹진군]] 접근로를 따라 공격하고, 전차를 선두로 한 주공은 [[취야]]~[[양원]]~[[강령]] 축선을 따라 공격하였다.
 
조선인민군의 기습으로 악전고투하던 국군은 좌전방의 제 1대대장이 전사한 지 얼마 후에 옹진지구의 주저항선이 돌파되었다. 이에 국군은 지체하지 않고 예비대를 투입, 역습에 성공하였으나 우전방부대 또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듯 승세를 이용한 인민군은 국군이 재편성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양원]]과 [[강령]]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군의 작전지역은 동서로 양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