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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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석 = 좌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1983년]]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첫 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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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득 타이틀 = <nowiki></nowiki>
*1983,1985~1987년 수위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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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효조'''(張孝祚, [[1954년]] [[7월 6일]] ~ [[2011년]] [[9월 7일]])는 전 [[
== 야구 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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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74cm, 체중 70kg에 지나지 않았던 장효조는 [[1972년]]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학년이었던 1973년에 각종 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대구상고를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정상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금사자기에서는 14타수 6안타를 몰아치며 우수선수, 타격 1위(0.428), 최다 안타상을 받았고<ref>[http://news.donga.com/3//20070705/8462712/1 ‘타격 달인’ 장효조“요즘 고교야구 투지 실종…잔꾀만 늘어”], 《동아일보》, 2007년 7월 5일</ref> 봉황대기에서도 타격왕을 수상했다.<ref name="park"/> 그 해 [[일본]]과의 고교야구 친선경기를 위해 대한민국 국가대표에 선발된 장효조는 다시 맹활약하여 한국이 2승 1무로 일본을 누르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74년에도 대구상고를 봉황기를 우승에 올려놓으며 또다시 타격왕과 최다안타 상을 수상했고<ref>[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109072138233&sec_id=510201&pt=nv ‘전설’ 장효조의 발자취], 《스포츠경향》, 2011년 9월 7일</ref>,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는 5할을 기록하며 다시 타격상을 수상했다. 장효조는 그 해 출전한 네 개 고교야구대회에서 0.383라는 타율을 기록했다.<ref>[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09/09/5815493.html?cloc=olink|article|default 〈노재현의 시시각각〉 장효조에게 명예의 전당을], 《중앙일보》, 2011년 9월 9일</ref>
[[1975년]] [[한양대학교]]에 진학한 장효조는 1학년 때
== 프로 야구 경력 ==
실업 팀 포항제철에 입단하였다가 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친 후
그는 기자들 가운데서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정도로 선구안이 뛰어났으며 그의 컨택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는 타격실력에 비하여 형편없는 수비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이 졌던 여러 원인중에 장효조의 캐치 미스가 있었다. 물론 그렇지만 해설자들이 평가하기로 그는 약한어깨긴하지만 유격수나 2루수가 커트 안하고 홈까지 직선으로 갈만큼 놀라운 송구정확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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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협 사태로 인해 [[1988년]] [[12월 21일]] 좌완 [[투수]] [[장태수 (1964년)|장태수]]와 함께 [[외야수]] [[김용철 (야구 선수)|김용철]]과 [[투수]] [[이문한]]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었다. 이는 [[최동원]]과 [[김시진]] 등이 트레이드된 후 한 달 후의 일이었다. [[1989년]] 1월 [[삼성 라이온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될 때 연봉 5,600만 원에 계약한 바 있다.
그가 [[삼성 라이온즈]]에서 지녔던 등번호 10번은 그가 팀을 떠난 뒤 [[1993년]]에 입단한 [[양준혁]]이 달기도 했는데, [[양준혁]]은 그와 동일하게 좌타자이면서 타격왕을 네 차례나 수상하였다. 네 차례의 타격왕 수상은 역대 타격왕 최다 수상 횟수이다. 두 선수의 통산 타율은 각각 장효조 0.331와 [[양준혁]] 0.316로서 한국 프로 야구 통산 타율 1위와 2위의 성적이다. 이에 따라 삼성 구단과 팬들은 등번호 10번이야말로 삼성 팀 내에서 가장 타율이 높은 타자가 물려받는 등번호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ref>[[스포츠 서울]] - 2007년 9월 기사 [http://www.sportsseoul.com/news/baseball/pro/070928/2007092872470854000.htm "이래서 내가 타격왕 해야 한다, 사연 있는 타격왕 전쟁"]</ref><ref>[[한국일보]] - 2009년 9월 기사 [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909/h2009091202363391800.htm "등번호엔 가치관 · 꿈 · 사연이…"]</ref><ref>[[일간 스포츠]] - 2010년 7월 기사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452630 "숫자로 본 양준혁 데뷔 이후 줄곧 썼던 등번호는?"]</ref>
[[2011년]] [[
== 사망 ==
그러나 레전드 올스타 행사 이후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간암과 위암이 동시에 발견되었고, 2군 감독직을 [[투수]]코치 [[양일환]]에게 넘기고 [[동아대학교]]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투병 도중 [[2011년]] [[9월 7일]] 오전 7시 30분 56세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두구동]] 영락공원의 묘지에
== 출신 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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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기록 ==
* 진한 바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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