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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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자 술라는 남부전선에서 속전속결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특히 당시 로마 군단에서 최고의 무훈을 세운 군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잔디 왕관]](corona graminea, corona obsidionalis)"을 받을 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마리우스와 함께 마르시(Marsi)족을 격파하고 폼페야니(Pompeiani)족의 클루엔티우스(Lucius Cluentius)를 공격했다. 클루엔티우스는 전투에서 술라에게 패한 뒤, 놀라(Nola)로 달아났으나 술라에게 추격당해 20000명이나 죽고 클루엔티우스도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이후 술라는 히르피니족(Hirpini)의 아이쿨라눔(Aeculanum)을 점령하고, 삼니테스(Samnites)족의 가이우스 파피우스(Gaius Papius Mutilus)를 격파했다.
 
=== 첫 번째 내전과내전 미트라다테스 전쟁쿠데타 ===
동맹시 전쟁이 종결되자 [[기원전 88년]] 술라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루푸스(Quintus Pompeius Rufus)와 [[로마 공화정]]의 최고의 직위인 [[집정관]]에 선출된다. 이와 함께 술라는 세 번째 아내와 이혼하고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하여 당시 유력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문의 후원을 얻었다. 집정관으로서 술라는 때마침 벌어진 [[폰투스]](Pontus)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지휘권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인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마리우스와 협력하여 민회를 소집하여 술라가 부여받은 미트라데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겨줄 것을 결의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으로 집정관 폼페이우스 루푸스의 아들이 죽고 루푸스도 도망쳤다. 술라는 잠시 피신했다가 [[놀라]](Nola)에 주둔한 군사를 규합하고 로마로 진군하였다.<ref>술라의 제1차 로마진군으로 로마 역사상 최초의 성공한 쿠데타이다.</ref>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술라가 쿠데타를 일으킬지 꿈에도 몰랐으며, 술라가 로마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로마에서 탈출했다. 술라는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술피키우스-마리우스 일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주했고 술피키우스는 참수되어 술라에게 보내졌다. 로마가 안정을 되찾자 술라는 집정관인 옥타비우스(Gnaeus Octavius)와 [[킨나]](Lucius Cornelius Cinna)에게 로마를 맡기고는 미트라다테스 정복전쟁에 나섰다.
 
=== 미트라다테스 전쟁 ===
 
[[기원전 87년]] 술라는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하고 [[아테네]]를 공격했다. 당시 아테네는 피레우스에서 주둔한 아르켈라오스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아테네의 농성군과 로마군은 투석전을 벌이며 매우 치열하게 싸웠다. 술라가 아르켈라오스가 판 땅굴에 황과 역청을 집어넣고 불태우자 많은 아테네군이 죽었다. 술라의 공격에 질린 아테네에서 강화사절을 술라에게 보냈고, 그 사절은 술라에게 아테네인들의 위대한 조상들의 업적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술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