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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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내전 및 로마 진격 ===
한편 술라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있을 때 로마는 다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민중파가 집권하여 술라를 반역자로 만들었다. 마리우스는 곧 죽었으나 뒤를 이은 [[킨나]]는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플라쿠스(Lucius Valerius Flaccus)를 [[기원전 86년]] 술라에 맞서는 정규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아시아로 파견하였다.<ref>킨나, 플라쿠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등 포풀라레스의 주요인물들이 파트리키이(patricii)였다. 여기서 술라의 배후에 존재한 세도가문이자 비파트리키이계열의 메텔루스 가와 파트리키이 가문들의 대립이 드러난다.</ref> 그러나 플라쿠스는 곧이어 일어난 군대의 폭동으로 살해당하고 부사령관 핌브리아가핌브리아(Gaius Flavius Fimbria)가 그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핌브리아는 미트라다테스를 격파하고 술라의 부하 루쿨루스를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를 자기편으로 포섭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술라는 그의 병력을 적군 가까이에 포진시켜 아군과 적군이 친밀감을 갖도록 했다. 적군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곧이어 적병들은 모두 진영을 탈주했고 결국 그 병력은 고스란히 술라에게 흡수되었다. 이후 핌브리아는 병사들에게 자신을 버리지 말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하여 자살했다. 술라는 킨나를 격동시키는 글을 써 킨나에게 보냈고, 이탈리아를 술라로 부터 방위하려던 킨나는 그리스에 있는 술라를 정벌하려고 군대를 편성하다가 군단 폭동으로 죽고 말았다.
 
[[기원전 83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술라는 귀족파를 규합하였다.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등이 술라를 지지했다. 당시 집정관은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였다.<ref> 노르바누스는 아라우시오 전투의 패장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를 탄핵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었고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누스의 형제인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자손이고 사투르니누스의 강경한 반대파로 그를 몰락시켰다. (포풀라레스 정권인 킨나 정부에 사투르니누스의 강경한 반대자인 스키피오가 왜 가담했는지 확실하게는 알수없는 일이다. 파트리키이 스키피오가 술라의 배후에 있던 메텔루스 가에 대한 반발감으로 킨나에 협력했을 가능성이 크다.)</ref> 노르바누스와 소 마리우스가 술라를 급습했으나 오히려 술라에게 대패하며 6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술라와 교섭을 하던 중에 병사들이 그를 버리고 술라에게 항복했다. 스키피오는 술라에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기원전 82년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소 마리우스가 집정관이 되었는데 카르보는 기원전 85년과 84년에 킨나와 집정관을 지낸적이 있는 2선 집정관이었다. (기원전 82년 당시는 3선 집정관이다.) <ref>카르보는 마리우스가 로마에서 도주할 때 동행했으며 킨나 사후, 포풀라레스의 중심인물이 되었다.</ref> 프라이네스테에서 소 마리우스는 술라의 병사들이 오랜원정에 지쳐있음을 알고 그들을 급습했지만 800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패주했다. <ref>플루타르코스, "술라"</ref> 이 소식을 들은 카르보는 메텔루스 공격을 멈추고 철수했으나 폼페이우스의 기습공격으로 큰 손실을 봤다. 술라의 적인 카리나스는 여러차례 술라에게 참패를 당했는데 그때마다 도망쳐 살아남았다. 이후 술라는 카르보가 출동시킨 군대를 모조리 무찔렀고 , 메텔루스 역시 파벤티아에서 카르보의 공격을 막아내고 10000명을 척살하였다. <ref>아피아노스, 「로마 내전사」. 당시 카르보는 야음을 틈타 기습했으나 어두움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카르보 진영의 노르바누스는 이 전투 이후 외국으로 망명하였다.</ref> 폼페이우스는 클루시움에서 카르보군을 2만명이나 죽였다. 한편, 삼니테스족의 폰티우스 텔레시누스는 로마로 진격하였고 술라는 소 마리우스에 대한 포위를 멈추고 콜리네 성문에서 텔레시누스와 크게 싸웠다. [[기원전 82년]] 11월 1일 콜리네 문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술라의 우익은 크게 적군을 격파하였으나 술라 자신이 이끄는 좌익은 적군의 우익과 두 군대가 괴멸되기 전 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이 전투 도중에 술라는 적진에서 날아오는 창을 고개를 숙여 피해 전장에서의 죽음을 면했다. 결국 적의 좌익을 섬멸한 술라가 승리하였고, 로마에는 다시 술라의 정권이 세워졌다. <ref>플루타르코스, "술라"</ref> 전투 후 소 마리우스와 텔레시누스는 동반 자살했고, 다른 집정관 카르보는 시칠리아로 달아나다 후에 폼페이우스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콜리네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로마로 입성한 술라는 대대적이고 철저한 반대파 학살에 착수했다. 우선 삼니테스족 패잔병 8000명을 원로원에서 회의하는 도중에 병사들을 시켜 학살했다.<ref>아피아노스, 「로마 내전사」</ref> 술라는 1만명의 노예를 해방시켜 자신의 씨족명 '코르넬리우스'를 하사하여 정적소탕의 행동대로 삼았다. 또한 살생부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적을 숙청했다. 그 살생부에 오른 인물은 모두 4천7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숙적 마리우스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그 시신은 부관참시되었고, 전년도 집정관이자 소 마리우스와 함께 술라를 공격한 노르바누스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도 제거되었다.(스키피오는 술라를 피해 도망가다 병사했다.) 이때의 살생부에는 18세의 킨나의 사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있었으나 카이사르는 학살을 면하고 도망쳤다. 한편 술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고 그의 안에는 수백명의 마리우스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한편 마리우스군 잔당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에게 격파되었으며 오직 히스파니아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만이 남아 술라에 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