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경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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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의 볼거리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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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폭포
 
대혜골의 중간지점 해발800여m 지점에 위치하는 폭포로 높이가 27m(28m라고도 함)인 이 폭포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위력은 금오산을 진동시키고도 남는다. 금오산을 소금강이라 하는 것도 폭포 주변의 경관이 크게 한 몫을 차지했으리라.
주변의 기암괴석의 천애 벼랑이 병풍처럼 에워싼 유곡에 짚동같이 쏟아지는 물소리며, 물보라에 7색 무지개가 하늘높이 솟아 오르곤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여기가 바로 신선세계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곳이다.
1935년인가 경상북도 도지사인 일본사람이 이 곳을 찾아 주변 경관과 물소리에 그만 매료 되어 한참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얼마만일까 옷 속에 스미는 한기에 정신이 간신히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눈앞이 막막하여 사물은 보이지 않고 그저 쾅쾅 울리는 소리만 있어 "하하 금오산을 울리는 소리"라고 탄복을 하고 자기의 시상(詩想)같은 것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석수를 불러 명금폭(鳴金瀑)이라 새기고는 신비의 극치인 이 곳 대자연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가노라고 기쁜 마음으로 취기에 흥얼거리며 하산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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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굴
 
대혜폭포에서 병풍처럼 펼쳐있는 벼랑을 끼고 북으로 따라 가노라면 쇠사슬로 만든 난간을 손잡이로 하여 간신히 발붙일 수 있도록 약간은 다듬은 듯한 흔적이 있는 천길 벼랑 중간을 붙어 오르다 보면 해운사가 발아래 가물거리고 다듬은 길이라 하나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어야 한발 한발 내 디딛을 수 있으니 오뉴월 삼복(三伏) 더위 때도 소름이 끼치니 납량(納凉)에는 다시 없는 곳 이기도하다.
구미공단과 낙동강하며 멀리 해평의 냉산(冷山) 등도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眺望)이라, 그것이 바로 극치의 풍경이라 하겠다. 수억 만년의 기나긴 세월에 풍마우세(風磨雨洗)로 시달리다 못해 움푹 패인 천연동굴로 이따금씩 박쥐나 새들이 쉬어 가는 곳을 신라 말 도선(道詵)이라는 고승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들어 참선(參禪)하여 도를 깨우쳐 우리 나라 최초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창시자가 되었다 한다.
그 후 언제부터 도선굴 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인재 선생의 일선지(一善誌)에 의하면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안으로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구옥(構屋-얽어 만든집)이 두칸이었다 하니 내부가 30평은 됨직하고 임진왜란 때는 인동(仁同), 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 ∼ 600명이 피난했으며 왜군은 빤히 보고도 범접을 못했다 하며 통로가 개설되기 전이라 바위틈에 가느다란 쇠못을 박고 칡이나 등·넝클을 휘어잡고 올라갔다 하며, 일선지에도 도선굴이라 했으니 조선조 초(初) 부터 이름이 불려졌으리라 추측된다. 고려때는 아마 대혈(大穴) 즉 큰 구멍이란 뜻으로 불렀던 것이 굴 아래 대혈사(大穴寺)라는 절이 있었다 했으니 여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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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경북 구미의 금오산 기슭에 자리한 채미정은 지방기념물 제55호로, 백이숙제의 덕을 사모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야은 길재 선생의 높은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여기서 채미(採薇)는 고비(薇:고사리 비슷한 식물)를 캔다는 뜻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금오산에 은거한 길재를, 고비를 캐먹으며 수양산에 은거했던 백이와 숙제에 비유하여 '채미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다. 채미정은 영조 44년(1768년)에 세워졌으며, 경모각, 구인제, 유허비, 홍기문이 있다.
 
 
약사암
 
경북 구미의 금오산 정상의 낭떠러지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약사암(藥師庵)은 신라시대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지리산 석불삼구 중 일구가 법당에 봉안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약사암의 겨울 설경은 일품이다.
 
 
금오산성
 
금오산(金烏山, 976m)의 정상부와 계곡에 이중으로 축조한 산성이다. 규모는 외성이 길이 약 3,700m, 내성이 약 2,700m이며, 성벽의 높이는 지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북문 근방은 약 3m, 험준한 절벽 위는 1m 정도이며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말기 왜구(倭寇)의 침입 때 주변지역의 백성들이 이 성에 들어와 지켰다. 그후 조선 태종(太宗) 10년(1410)에 나라에서 크게 고쳐 쌓았으며, 왜란(倭亂)·호란(胡亂) 직후와 고종(高宗) 5년(1868)에 계속해서 고쳐 쌓았다.
성내에는 고종 때 대원군의 지시로 세운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金烏山城重修訟功碑)'가 있는데 이것은 산성과 건물을 중수한 후 세운 기념비로 백성의 생업 종사 및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