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경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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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의 볼거리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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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폭포
주변의 기암괴석의 천애 벼랑이 병풍처럼 에워싼 유곡에 짚동같이 쏟아지는 물소리며, 물보라에 7색 무지개가 하늘높이 솟아 오르곤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여기가 바로 신선세계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곳이다.
1935년인가 경상북도 도지사인 일본사람이 이 곳을 찾아 주변 경관과 물소리에 그만 매료 되어 한참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얼마만일까 옷 속에 스미는 한기에 정신이 간신히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눈앞이 막막하여 사물은 보이지 않고 그저 쾅쾅 울리는 소리만 있어 "하하 금오산을 울리는 소리"라고 탄복을 하고 자기의 시상(詩想)같은 것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석수를 불러 명금폭(鳴金瀑)이라 새기고는 신비의 극치인 이 곳 대자연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가노라고 기쁜 마음으로 취기에 흥얼거리며 하산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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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굴
구미공단과 낙동강하며 멀리 해평의 냉산(冷山) 등도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眺望)이라, 그것이 바로 극치의 풍경이라 하겠다. 수억 만년의 기나긴 세월에 풍마우세(風磨雨洗)로 시달리다 못해 움푹 패인 천연동굴로 이따금씩 박쥐나 새들이 쉬어 가는 곳을 신라 말 도선(道詵)이라는 고승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들어 참선(參禪)하여 도를 깨우쳐 우리 나라 최초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창시자가 되었다 한다.
그 후 언제부터 도선굴 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인재 선생의 일선지(一善誌)에 의하면 넓이가 16척, 높이가 15척, 안으로 깊이가 24척으로 그 안에 구옥(構屋-얽어 만든집)이 두칸이었다 하니 내부가 30평은 됨직하고 임진왜란 때는 인동(仁同), 개령(開寧)의 수령과 향민 5 ∼ 600명이 피난했으며 왜군은 빤히 보고도 범접을 못했다 하며 통로가 개설되기 전이라 바위틈에 가느다란 쇠못을 박고 칡이나 등·넝클을 휘어잡고 올라갔다 하며, 일선지에도 도선굴이라 했으니 조선조 초(初) 부터 이름이 불려졌으리라 추측된다. 고려때는 아마 대혈(大穴) 즉 큰 구멍이란 뜻으로 불렀던 것이 굴 아래 대혈사(大穴寺)라는 절이 있었다 했으니 여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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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약사암
금오산성
고려 말기 왜구(倭寇)의 침입 때 주변지역의 백성들이 이 성에 들어와 지켰다. 그후 조선 태종(太宗) 10년(1410)에 나라에서 크게 고쳐 쌓았으며, 왜란(倭亂)·호란(胡亂) 직후와 고종(高宗) 5년(1868)에 계속해서 고쳐 쌓았다.
성내에는 고종 때 대원군의 지시로 세운 '금오산성 중수 송공비(金烏山城重修訟功碑)'가 있는데 이것은 산성과 건물을 중수한 후 세운 기념비로 백성의 생업 종사 및 태평성대를 구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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