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성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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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 20년, [[효전성황후]]가 급서하자 차기 황후로서 [[황귀비]](皇貴妃)로 진봉하여 육궁을 통솔했는데, 청나라의 [[황귀비]]는 황후가 사망했을 시 상례(喪禮)를 마치기까지 차기 황후 내정자를 봉작해 황후 대리직을 수행토록 하는 작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각별히 사랑했던 [[효전성황후]]의 죽음에 깊이 애도한 [[도광제]]는 [[효전성황후]]의 상례를 마친 뒤에도 황후를 책립치 않아 결국 [[도광제]]가 서거하기까지 6년 간 황후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도광제]]를 이어 황위에 오른 9대 문종 [[함풍제]]([[효전성황후]]의 아들)는 황귀비 보르지긴 씨를 사실상 황태후(皇太后)의 예우로 받들어 효자황귀비(孝慈皇貴妃)로 존호를 가상했는데<ref>《청사고(淸史稿)》卷二十 本記 二十 文宗本記 "三十年正月丁未,(중략) 宣宗崩,己未,上即位,颁诏覃恩,以明年为咸丰元年。尊皇贵妃为'''孝慈皇贵妃'''。"</ref>, 호(號)에 효(孝)를 쓸 수 있는 건 후(后)에게 한정된다.<ref group="註">《청사고(淸史稿)》卷二百十四 列傳一 后妃에는 황제로 어위한 문종 함풍제가 그녀를 황고 강자황귀태비로 봉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청사고(淸史稿)》 문종본기(文宗本記) 3년 기록에 병환으로 위중한 황귀태비를 강자황태후로 존봉하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기록 오류가 아니라면 앞서 가상했던 존호인 효자(孝慈)를 이후 강자(康慈)로 교체하고 황귀태비로 봉숭(封崇)한 것으로 보인다.</ref>
 
함풍 5년 7월, 그녀가 병환으로 위독해지자 함풍제는 그녀를 황태후로 존봉토록 하여 강자황태후로 올렸으며<ref>《청사고(淸史稿)》卷二十 本記 二十 文宗本記 "秋七月壬戌朔,尊皇贵太妃为康慈皇太后。</ref><ref>《청사고(淸史稿)》卷二百十四 列傳一 后妃 "咸丰五年七月,太妃病笃,尊为康慈皇太后。"</ref>, 9일 뒤 그녀가 44세(만 4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황후로 추존했다. 이때 그녀에게 추시된 시호는 '''효정강자필천보성황후'''(孝靜康慈弼天輔聖皇后)로, [[도광제]]의 다른 황후들과는 달리 시호의 마지막에 [[도광제]]의 마지막 시호인 성(成)이 더해지지 않았다.<ref>《청사고(淸史稿)》卷二十 本記 二十 文宗本記 "八月 (중략) 庚子,上大行皇太后尊谥曰孝静康慈皇后。"</ref><ref>《청사고(淸史稿)》卷二百十四 列傳一 后妃 "越九日庚午,崩,年四十四。上谥,曰孝静康慈弼天抚圣皇后,不系宣宗谥,不祔庙。葬慕陵东,曰慕东陵。"</ref> 이는 [[명나라]]에서 서후(庶后)를 추존하던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가까이는 청의 3대 황제인 세조 [[순치제]]의 서후(庶后) [[효헌단경황후|효헌황후]] 동악 씨가 그녀의 정통성을 부정한 [[강희제]]로 인해 [[순치제]]의 시호 마지막 글자를 받지 못한 바 있다.<ref group="註">[[강희제]]가 후궁 출신인 자신의 생모 [[효강장황후]]와 역시 후궁 출신인 조모 [[효장문황후]]를 적후의 예로 추시한 것을 시점으로 청나라 황후의 시호는 적후와 서후의 차별이 뚜렷했던 명나라 때와는 달리 경계를 두지 않는다. 이에 청나라의 황후는 시호의 가장 앞 글자에 효(孝)를 쓰고 마지막 글자에 남편의 시호의 마지막 글자를 써서 총 홀수(기본 13자)로 구성된 시호를 썼다.</ref> 이후 10대 황제인 목종 동치제가 즉위하여 그녀에게 시호를 증시하여 시호에 의소단혜(懿昭端惠)와 [[도광제]]의 시호 마지막 글자인 '성(成)'을 추가하고 그녀의 신주를 태묘(太廟)에 부묘하여 정식 황후로 추존했다. <ref>《청사고(淸史稿)》卷二十 本記 二十一 穆宗本記 "庚申,上孝静成皇后尊谥曰孝静康慈'''懿昭端惠'''弼天抚圣'''成'''皇后。"</ref><ref>《청사고(淸史稿)》卷二百十四 列傳一 后妃 "穆宗即位,祔庙,加谥"</ref> 훗날 청의 마지막 황제인 13대12대 공종 [[선통제]] 때 시호가 증시되어 최종 시호는 '''효정강자의소단혜장인화신필천무성성황후'''(孝靜康慈懿昭端惠庄仁和慎弼天撫聖成皇后)이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