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베넨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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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무렵 그는 목과 위장 등에 희귀병인 열대성 스프루에 걸려,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6개월 간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이탈리아]]에 갔고, 이후 변호사 직을 아예 그만 두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고, 대중들을 사로잡지 못한 변호사 대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 사면위원회인생을 뒤바꾸다 ===
[[파일:Salazar1.jpg|180px|섬네일|오른쪽|[[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오 살라자르]]는 1932년부터 1968년까지 포르투갈을 지배하였다. 그는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모든 정치적 행위 및 표현을 금지시켰고,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리스본에서 자유를 외쳤던 두 학생도 만약에 민주국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더라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그의 정권 하에서는 결국 정치적 탄압을 받은 셈이었다. 이는 베넨슨을 자극하였고, 훗날 앰네스티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베넨슨에게 결정적인 일이 터졌는데, 어느 날 런던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데일리 텔레그라프 지 외신란에서 이런 기사를 봤다.<ref name="peter" /> 사실 어느 신문에서나 볼 만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나라의 상황을 봤을 때 너무나도 무모하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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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가였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당시 [[포르투갈]]은 안토니오 살라자르라는 독재자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의 정권은 자유와 인권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철저한 '독재정권'이었다. 순식간에 화가 난 베넨슨은 결국 종점 훨씬 전인 트라팔가르 광장에서 내려버렸다. 당장 포르투갈 대사관에 가서 항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래봤자 들어주지도 않을 게 뻔하여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가만히 둘 수 없었던 나머지 화가 계속 났고, 급기야 심한 현기증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고자 성 마틴 인 더 필드 교회로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좀처럼 풀리지 않는 화에 결국 교회 밖을 나와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로 가는 길에 스스로 포르투갈 독재정권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며 혼잣말을 계속 했다. 후에 그는 [[옵서버]]에 "잊혀진 죄수"라는 의견광고를 실었고,<ref name="peter" /> 이는 곧 국제사면위원회를 조직하는 계기가 된다.<ref name="peter" />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세계 난민의 해'라는 이름의 국제 운동이 수백만 난민들의 집을 찾아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마찬가지로 리스본의 학생들처럼 독재정권의 희생자들을 도울 방법이 있지 않을 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곧바로 이에 대해 친구들과 논의했다. 비록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 이름을 '1961, 사면을 위한 호소'라고 지었다. 이것은 곧바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로 이어진다.
은 양심수들의 인권운동을 사면위원회를 조직하여 시작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인]]([[로마 가톨릭]])인 베넨슨은 [[양심수]]들이 박해받는다는 사실에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고,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사면위원회를 조직하여 양심수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였다.
 
이를 보고 베넨슨은 이후 그는 [[국제 사면 위원회]]를 설립했다.
 
===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