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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의 왜구 ===
건국 초기의 왜구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1393년(태조 2) 3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에 비교적 많은 사례들이 나타난다. 또한 같은 해 11월 [[도평의사사]]에서 왜적 피해가 줄어 든 것이 병선의 위력이라고 언급한 내용<ref>《[[조선왕조실록]]》〈[[:s:태조강헌대왕실록/2년]]〉11월 28일 세 번째 기사 “都評議使司以救弊事宜, 條陳上言:其一曰近來倭寇稍息, 實賴兵船之力。”(도평의사사에서 폐해를 구제하는 사의(事宜)로써 조목별로 진술하여 말씀을 올렸다. “1. 근래에 왜적(倭賊)의 침구가 조금 쉬게 된 것은 실로 병선(兵船)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 </ref>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의 왜구 방어 대책이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ref>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역사와 현실》(74호) 한국역사연구회, 423쪽, “왜구는 고려와의 격전을 통해 세력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의 왜구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에 비교적 많은 사례들이 나타난다. 비록 구체적인 피해상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고려 말에 비해 피해규모가 크게 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같은 해 11월 도평의사사에서 왜적 피해가 줄어 든 것이 병선의 위력이라고 언급한 내용을<sup>8)</sup> 살펴보면 당시 조선의 왜구 방어 대책이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8)『太祖實錄』 권4, 太祖 2년 11월 己巳”</ref> 1394년(태조 3)에도 왜구와 왜적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보다는 조선 수군이 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ref>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역사와 현실》(74호) 한국역사연구회, 423쪽, “태조 3년에도 왜구와 왜적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차례 나타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보다는 조선 수군이 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sup>9)</sup>... 9) 『太祖實錄』 권5, 太祖 3년 3월 丙辰 ; 『太祖實錄』권6, 太祖 3년 8월 壬午”</ref> 1396년(태조 5년)에는 왜구가 동래(東萊)의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였다. 1406년(태종 6년)에는 전라도에, 1408년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혹은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혹은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도 하였다. <ref>《[[세종실록]]》, 〈[[:s:zh:朝鮮王朝實錄세종장헌대왕실록/1년/世宗實錄#69日|元年(1419年) 六月 九日]]〉(원문), 〈[[:s: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6월 9일|원년(1419년) 6월 9일]]〉(번역문) </ref>
 
1419년([[세종]] 1년)에는 [[대마도 정벌|대마도를 정벌]]하고 [[3포]]를 폐쇄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부산포, 웅천, 염호 등 삼포를 개항하여 사절(使節)과 상왜(商倭)를 왜구와 구별하여 일본인들과의 정식적인 무역을 유도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