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협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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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unich Agreement map ko.svg|thumb|250px|'''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br />
'''1.''' [[수데텐란트주데텐란트]]가 독일에 병합됨 (1938년 10월)<br />
'''2.''' 체코 톄신이 폴란드에 병합됨 (1938년 10월 2일).<br />
'''3.''' 헝가리 민족이 거주하는 국경 지역을 헝가리에 병합 (1938년 11월 2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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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슬로바키아는 독립국으로 존속.]]
 
'''뮌헨 협정''' ({{llang|en|Munich Agreement}} ,{{llang|cs|Mnichovská dohoda}}, {{llang|sk|Mníchovská dohoda}}, {{llang|de|Münchner Abkommen}}, {{llang|fr|Accords de Munich}})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주데텐란트]] 독일계영토 주민들이분쟁에 많이관련된 살고협정으로, 있던1938년 9월 30일 독일 [[수데텐란트뮌헨]]에서 영토[[영국]], 분쟁에[[프랑스]], 관련된[[나치 협정이다독일|독일]],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가 체결했다. 1차 협정은대전 독일종전 이후 국제연맹은 [[뮌헨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논의되었으며민족자결주의에 체코슬로바키아는따라 참석하지다수의 않은채국민국가로 유럽분할하여 열강들만중유럽 참석한문제를 채로해결하고자 체결됐다.하였으나, 히틀러는 회담은이를 나치역이용하여 독일에독일민족의 대한자결과 유화책이었다독일인의 '생활공간'({{llang|de|Lebensraum}}) 확보를 요구하였다. 이에 협정에서따라 1938년 3월 독일계 국가인 [[영국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독일은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 거주자 다수 지역인 [[프랑스주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하였다. 이에 양국간 군사적 긴장이 커지자, 또 다른 세계 대전의 발발을 피하고자 했던 [[이탈리아영국]]과 왕국|이탈리아[[프랑스]]는 뮌헨 회담을 열어 히틀러의 요구대로 독일이 수데텐란트를주데텐란트를 합병하도록 승인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가나치 독일에 회담에대한 참석하지유화 못했기정책 때문에,기조에 따라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사자임에도 이 회담에서 배제되었다. 오늘날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뮌헨 협정을 '''뮌헨 늑약'''({{llang|cs|Mnichovská zrada}}; {{llang|sk|Mníchovská zrada}})이라고도 불리며부르며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뮌헨의 배신'''({{llang|cs|Mnichovská zrada}}; {{llang|sk|Mníchovská zrada}})이라고도 불린다부른다.
 
== 히틀러의 요구 ==
[[1938년]] 3월,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다음은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수데텐란트주데텐란트]]를 합병할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나치 독일의 정치인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친독일계 정당인 [[수데텐란트주데텐란트 독일당]]이 독일인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서 자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수 민족인 독일인은 고국 독일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 정권 동안 프랑스 정부에 정치적,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전쟁에 대해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위기를 해결하려 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비에트 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과도 체코슬로바키아의 방어를 위해 영국, 프랑스와 협력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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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열강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열강은 독일의 군사 능력을 심각한 수준이라고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이 독일 국방군 (''Wehrmacht'')보다 우세했지만 대규모의 재무장을 하고 있는 독일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독일군의 힘을 과장하여 유럽 열강과 전쟁을 했을 때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을 피하자고 설득하였다. 무솔리니와 이탈리아는 전쟁에 대비되지 않았고, 독일의 급성장에 대해 우려하였다. 독일 군부도 독일군의 실상을 알고 있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이용했다.
 
영국의 총리인 [[네빌 체임벌린]]은 9월 15일에서 16일에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나 히틀러의 양보를 요구했다. 히틀러가 추가적 논의 없이는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영국은 내각과 프랑스에 수데텐란트 주민들의 주민투표 결과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9월 22일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Georges Bonnet)는 런던에서 영국 외교관과 만나 수데텐란트의주데텐란트의 인구 50% 이상을 독일에 보내는 것을 수용하기로 하는 합동 성명을 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9월 21일 마지못해 수용하기로 했다. 이 제안은 히틀러의 성에 차지 않았고, 9월 22일 고데스베르크(Godesberg)에서 히틀러를 만났을 때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는주데텐란트는 독일에 합병되어야 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8일까지 수데텐란트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새로운 제안을 했고, 영국 내각과 프랑스, 체코 정부에서 거부되었다.
 
9월 23일, 새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얀 시로비]]는 총동원령을 내렸고<ref>[http://www.nizkor.org/hweb/imt/tgmwc/tgmwc-15/tgmwc-15-146-09.shtml Records of the Nuremberg trials]</ref>, 1백만 명 이상의 완전무장된 군사가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9월 24일,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분적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체임벌린은 4강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전쟁을 피하려는 체임벌린의 생각에 따라 히틀러, 체임벌린, 달라디에와 무솔리니는 뮌헨에서 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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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 해결 ==
 
협상은 9월 29일에 접점에 다다랐다.<ref name="Gilbert&Gott">Gilbert, Martin and Gott, Richard, ''The Appeasers'' (Weidenfeld Goldbacks, Weidenfeld and Nicholson, London, 1967), p. 178.</ref> 아돌프 히틀러와 네빌 체임벌린, 베니토 무솔리니와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뮌헨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은 고데스베르크에서의 제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일군은 10월 10일까지 수데텐란트의주데텐란트의 점령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국제 기구는 다른 분쟁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 주석 ==
<references />
 
== 함께 보기 ==
*[[주데텐란트]]
{{commonscat|Munich Agreement}}
 
*[[수데텐란트]]
== 주석각주 ==
<references />
 
== 바깥 고리 ==
*{{commonscat위키공용분류-인라인|Munich Agreement}}
*뮌헨 조약 전문 ([http://avalon.law.yale.edu/imt/munich1.asp 영어] / [http://www.glasnost.de/db/DokAus/38muenchen.html 독일어])
*{{언어고리|de}} [http://www.dhm.de/lemo/html/nazi/aussenpolitik/muenchnerabkommen/index.html 뮌헨 조약에 대한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