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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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 직전, [[38선]]에 경계한 [[동두천]] · [[포천군|포천]]과 그 후방인 [[의정부시|의정부]] 지역은 [[대한민국 7보병사단|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의 예하 제1 · 9연대와 포병 ·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중, 제9연대(연대장 [[윤춘근]] 중령)는 포천 정면에 배치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하에 제1군단(군단장 [[김웅 (군인)|김웅]] 중장)의 2개 사단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할 준비를 해 두었다. 발발 당일, 북한군 제3사단(사단장 이영호 소장)은 영내에 대기하고 있던 한국군 제9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경계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대대장 [[전순기]] 소령)는 북한군의 포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윤춘근)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 · 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포천시)|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 · 9연대는 [[호국로 (경기도)|호국로]]를 따라 남침을 계속했다. 이에, 제9연대 제1 · 3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의정부시|의정부]] 등에서 집결했다. 한편,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의 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1922년)|이상근]] 중령)가 포천에 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의 기계화부대에 밀려서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를 거듭했다.(이상, 6월 25일) 이로써 축석령 너머에 있는 의정부는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 제9연대의 영내 내기대기 ===
다행히도 제9연대의 전 장병이 영내대기 상태에 있었으니, 이는 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전날 사단으로부터 “재량에 따라 주말외출을 실시토록 하라”는 통보를 받고, 오랫동안의 긴장 속에서 대기한 바 있는 병사들에게 외출과 외박을 허용할까 생각하다가 당면의 적정이 수상한 까닭으로 영내에서 휴무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