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1세 (잉글랜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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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는 부왕 이래의 [[종교 개혁]]을 뒤엎어 로마 가톨릭의 복귀 정책을 실행에 옮겼으나, 교회의 재산을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휴 레티머]]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등의 [[성공회]]성직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을 차례대로 체포하여 처형시켰는데, 그 수가 3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그녀는 ‘피의 메리(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고로, [[칵테일]]의 일종인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은 이 메리에 유래한다. 또한 [[1549년]]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가 작성한 [[성공회 기도서]]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녀는 또 "마틴 루터 존 칼뱅, 마일스 코베르달레, 에라스무스, 틴데일 등등의 이름으로 씌어진 책들, 원고들, 혹은 보고서들, 또한 가톨릭에서 어긋나는 그릇된 원리들이 씌어 있는 책들을 영국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지위고하, 출신을 망라하여 모두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런 독선적인 친가톨릭 정책은 개신교인들의 반발을 불렀다.<ref>폴임<<책속의책2>>P24</ref>
[[에스파냐의 군주|에스파냐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메리는 자신의 결혼 상대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아스투리아스 공]]인 [[펠리페 2세|펠리페]]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 왕자와의 결혼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많았으며, 켄트에서 토마스 와이어트 등이 봉기를 일으킬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었지만, 반란은 실패하였고 토마스는 처형되었다. 이 때도, 또 이후 일어나는 반란에서도 모두들 엘리자베스를 왕위에 올릴 것을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