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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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유키'''({{llang|ja|織田信行}}, [[1536년]] ~ [[1557년]]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이름은 일반적으로 노부유키라고 유포되어 있으나, "오다계도(織田系図)", 자기발급문서에는 노부카쓰(信勝), 타쓰나리(達成), 노부나리(信成) 밖에 확인되지 않았다. 또 노부유키의 이름 외에는 노부카쓰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통칭은 간쥬로(勘重郎)
 
아버지는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같은 도타고젠(土田御前)의 아이로 노부나가의 친형제에 해당한다. [[스에모리 성]](末森城)의 성주, 부인으로는 카스가가스가 교부(春日刑部)의 딸과 와다 비젠노카미(和田備前守)의 딸이 있다. 아들에는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 살해당하나 [[쓰다 노부스미]](津田信澄), 노부나가의 아들인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를 섬긴 [[오다 노부카네]](織田信兼) 등이 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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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분 24년([[1555년]]) 5월 경, 타쓰나리는 대대로 당주가 자칭해 온 단조추(弾正忠)의 관직을 노부나가를 그대로 두고 자칭하게 되어, 가문 내에서 유일한 대항자가 되어갔다.
 
같은 년 6월,동생 [[오다 히데타카]](織田秀孝)가 숙부 노부쓰구(信次)의 가신 · [[스가 사이조]](洲賀才蔵)에게 잘못 살해당했다. 그것을 들은 타쓰나리는 격노해, 노부쓰구의 거성 ·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성 아래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것에 대해 노부나가는 "무방비했던 히데타카에게 죄가 있다."라며 타쓰나리를다쓰나리를 견제했으나, 오다 가문의 가신들은 친족의 유대를 존중한 타쓰나리에게, 보다 당주로서의 기대를 거는 결과가 되었다.
 
[[코우지]](弘治) 2년([[1556년]]) 4월, 노부나가의 지원자였던 장인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이 적남 [[사이토 요시타쓰]](斎藤義龍)와의 전투에서 패해 죽었기 때문에, 타쓰나리는다쓰나리는 [[하야시 히데사다]](林秀貞), [[하야시 미씨토모미치토모]](林通具),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등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노부나가에 대해서 거병해, 노부나가의 직할지인 시노기(篠木) 미사토(三郷)을 횡령하도록 했다. 그러나 8월 24일, 이노(稲生)에서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했고, 이어서 하야시 미씨토모가미치토모가 전사했다.([[이노 전투]](稲生の戦い)) 패한 타쓰나리는 스에모리 성에서 농성했고, 노부나가 · 타쓰나리 두 사람은 생모인 도타고젠의 중재에 의해 하야시 히데사다 · 시바타 가쓰이에들이 사면되었다.
 
코우지 3년([[1557년]]), 무사시노카미(武蔵守) 노부나리는 [[이와쿠라 성]](岩倉城)의 [[오다 노부야스]](織田信安)를 통하는 등으로 다시 모반을 꾀해, 시노기 미사토를 횡령하도록 했으나, 노부나리가 그의 가신과 대립하고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가 이것을 노부나가에게 통보했다. 그 후, 노부나리는 노부나가가 병에 걸렸다는 보고를 받고,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일의 진위를 떠보자 "노부나가도노를 속여 양도장을 쓰게 하시면 [[오다 노부토모]](織田信友)도노도 없는 지금, 오다 가문은 당신 것입니다."라고 설득당했다. 그리고 11월 2일에 [[기요스 성]](清洲城)에 노부나가의 병문안을 갔다가, 기요스성 북로(北櫓) 천주차(天主次)의 사이에서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카와지리가와지리 히데타카]](河尻秀隆)에게 암살당했다.
 
아들인 보마루(坊丸, 후의 쓰다 노부스미)는 도타고젠의 조명도 있어, 목숨을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