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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의 삼걸은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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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광해군 3년) 그는 우찬성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12년]] [[의정부]][[좌찬성]]을 거쳐 [[의정부]][[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이이첨]], [[허균]] 등과 함께 [[계축옥사]]를 일으켜 [[김제남 (1562년)|김제남]]과 영창대군을 탄핵하는데 지지하였다. [[1613년]]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김제남 (1562년)|김제남]]을 비판하고, 영창대군을 지원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주장했으나 그는 전은론(全恩論)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의 축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4년]] [[영창대군]]의 사형 여론이 나오자 이에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정운공신 1등(定勳功臣1等)에 책록되었고, [[1615년]]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받았다.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참여하였으며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된 뒤 [[의정부]][[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인륜에 어긋난다 하여 [[인목대비 폐모론]] 폐모론에 반대하였으나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판하는 소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 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ref>이 일로 북인정권을 관망하던 남인이 북인의 적으로 돌변했다.</ref>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당하였다.
 
그는 영의정을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고 광해군의 간곡한 부탁 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외부와 연락을 끊고 [[합천]]에 내려가 은둔하였다. [[1618년]] [[광해군]]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 '국사는 더욱 어렵고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어 경을 영상에 삼으니 급히 올라와 어려운 시국을 구하고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며 영의정 취임을 재촉하는 유지를 보낸다. 광해군의 거듭된 부탁으로 상경하였으나 [[1619년]] 다시 [[영의정]]을 사퇴하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