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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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참고|인목대비 폐모론|인조 반정}}
1613년 [[대북]] 강경파의 건의로 [[인목대비 폐모론]] 폐모론이 주청되자 그는 폐모론이 옳지 못함을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이수광은 관직을 떠나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 <ref name="송건호"/>{{Rp|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6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고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