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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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 부모 = 아버지 김용겸, 어머니 이말대, 계모 한은총
| 배우자 = 이노익(1921년 이혼), 오오타 세이죠, 하윤실(1929-1931년)
| 자녀 = 아들 김태신(일당)
| 친척 = 동생 [[김진범]], 여동생 [[김진숙]]
| 장르 = 시, 소설, 수필
| 홈페이지 =
}}
'''김일엽'''(金一葉, [[1896년]] [[4월 28일]] ~ [[1971년]] [[2월 1일]])은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자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시인 겸 수필가이다.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을 주장하였고<ref name="chinjong">[http://news.donga.com/3/all/20080917/8631400/1 <nowiki>[</nowiki>근대의 풍경 20선<nowiki>]</nowiki> <15>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동아일보 2008.09.17</ref>, [[순결]]의 무의미함을 주장했다.<ref name="soon1">[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0020917000201 소외받은 근대女작가 3인 탐구] 문화일보 2000.02.09</ref>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친구 춘원 [[이광수]]가 [[일본]]의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준 필명을 따서 일엽이라는 필명을 썼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배려로 [[삼숭보통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뒤 [[1913년]]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日新女學敎)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ref name="seonmun">[http://news.donga.com/3/all/20010129/7640914/1 <nowiki>[</nowiki>출판<nowiki>]</nowiki> 일엽스님 禪文集 다시 본다…30주기 맞아 재발간] 동아일보 2001.01.29</ref> [[일본]] 유학 중 문인으로 데뷔하여 시와 소설, 칼럼 등을 발표하였으며 귀국 후 [[1920년]]에는 [[폐허]] 지의 동인으로 참여하고, [[1920년]]에는 [[신여성신여자]]지를 직접 창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일본 유학 중 [[임노월]], [[오오타 세이죠]] 등과 자유 연애를 하였다창간하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1년]]과 [[1931년]] [[매일신보]]의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의 기자로도 있었으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문단]], [[매일신보]] 등에 칼럼과 논설을 기고하였고, [[1925년]]부터 3년간 [[아현보통학교]]의 교사로도 근무하였다.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의 성여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 자유 연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이화학당 결혼에시절부터 종교에 대한 실패하였으며회의를 해오다, 사회의1927년 편견에불교잡지 시달리다가 불교의 문예란에 기고하면서 불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1930년대 초 서울의 선학원 등에서 참선을 하였으며, [[1933년]] 만공선사 하에서 출가,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승려가1971년 되었다입적한다. 이후출가시 [[만공만공선사]] 권고로선수행을 문필위해 읽고 쓰는 거을 중단하라는 말을 따라, 20여년 집필 활동을 중단하다가중단하다 [[1960년]]대1950년대 '청춘을후반에 불사르고'다시 등과글을 수필집들을발표하기 발표하였으며,시작한다. [[불교1960년]] 사회<어느 운동을수도인의 하였다.회상>을 일엽은발표하고, 본래1962년 필명이었다가<청춘을 승려가불사르고>를 발표하며, 1964년에 [[법명]]으로도마지막 사용하였다저서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를 발표한다. [[불명]](佛名)은 하엽(荷葉), 도호(道號)는 백련도엽(白蓮道葉), 하엽당(荷葉堂),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다른 이름은 원주(源珠)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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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안악군]]에 살던 과부 [[한은총]](韓恩寵)과 재혼하였다.<ref>정치인 정일형의 어머니이다.</ref> 한은총은 [[의병]]장 [[정원모]]의 아들인 정기찬(鄭基贊)의 아내였으나 남편과 시아버지가 연이어 죽자, 어린 아들 정신형을 데리고 그의 아버지인 김용겸과 재혼하였다. 이때 계모 한은총은 본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정일형]]과 [[정신형]]을 두었는데, 큰아들인 [[정일형]]은 두고 어린 아들 신형만 데리고 그의 집으로 왔다.
 
==== 불우한 청소년기 ====
[[1907년]] 12세 때에는 어린 동생이 죽고, 연이어 세 동생이 죽었다. 그 해 그는 순[[한글]]로 된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서 발표하였다. [[1913년]] 아버지 김용겸 마저 사망하여 김일엽은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밝고 명랑하게 생활했지만,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신여자]]지 창간호에 그의 단편논설 계시와 함께 실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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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삼숭여학교]]를 마치고, 같은 학교의 보습과(補習科)로 진학했다.
 
=== 청년기 ===
==== 이화학당, 이화여전 시절 ====
12세에 동생의 죽음으로 처음 큰 슬픔을 맛보기 시작, 이어서 세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다 잃고는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가정 환경은 어려웠으나, 70 고령의 외할머니의 뒷바라지로 김원주는 학업을 계속하였다. [[1913년]] [[이화학당]] 중등부([[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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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봄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에 입학하고, 동시에 [[도쿄 대학]] 영어준비학원에도 수강한 하였다. [[1918년]] 여름에 [[닛신여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18년]] 여름 [[미국]]유학파인 [[연희전문학교]] 화학 교사로 있는 40세의 [[이노익]]과 [[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네브라스카 주|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 [[화학|화학과]]를 졸업한 [[이노익]]은 [[1915년]]부터 [[연희전문]]에서 [[화학]][[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이노익]]은 다리가 하나가 없는 [[장애인]]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ref name="gyemong">[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5003 수덕여관 손님, 나혜석과 김일엽] 오마이뉴스 2005.08.17</ref> [[이노익]](李魯益)은 당시 이혼남이었는데,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늙으신 외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이노익]]과 결혼하여 빨리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훗날 회고록에서도 [[오오타 세이죠]], [[임노월]], [[백성욱]] 등에 대한 언급과 애정은 곳곳에서 표현하는 한편, [[이노익]]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
 
==== 일본 유학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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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에서 잡지 <[[여자계(]]女子界)>의 주간인 신여성 [[나혜석]]을 만났는데 [[나혜석]]은 그보다 6년 먼저 일본유학을 와서 1914년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로 유명해졌고 [[1917년]]부터는 [[일본]]의 [[조선인]] [[여자]] 유학생들의 잡지 <여자계>의 주간으로 있었다. 이때 김원주는 귀국 후 조선에서도 여성 잡지를 발행하겠다는 뜻을 품게 된다.
 
[[동경]] 유학 생활에서 [[일본]] 유학생이던 시인 노월 [[임장화]]를 만났다. 결국 일본 유학시절때문에 본처가 한국에 있는 시인 노월 [[임장화]]와 간통한 사건으로이노익과 이혼을 하게 된다.<ref name="gyemong"/> 그러나 남편 [[이노익]]은 이 일을 문제삼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의족이 공포스럽다는 김원주의 뜻을 존중하여 고이 보내준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임장화]]와 한때 동거하였는데, 소설가 [[김동인]]은 이를 두고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 3.1 운동과 여성잡지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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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후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도 친구 사이로서 공개적인 글을 주고 받는 등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유명해졌다.
 
이때 [[이광수]]는 그에게 일엽이라는 필명을일본의 지어주었다.유명한 [[이광수]]가작가 히구치 이치요 (樋口一葉, ひぐち いちよう, 1872년 5월 2일 ~ 1896년 11월 23일)처럼 한국의 이치요가 되라고, '일엽' (이치요의 한국발음) 이라는 필명을 지어준지어준다. 김일엽은 그는이후 일엽이라는이를 필명을필명으로 그리고 출가후에는 법명으로 사용한다. [[신여자]] 1호에서는 원주라는 본명을 사용하지만, 2호부터는 일엽이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ref>박숙자, 《한국 문학과 개인성》 (소명출판, 2008) 290페이지</ref>
 
그는 남편 [[이노익]]의 적극적인 지원과 [[이화학당]] 시절 교수 중 그를 높이 평가한 빌링스 부인의 재정 후원으로 일엽은 여성종합잡지 [[신여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총각으로 알았던 남편 [[이노익]] 교수가 총각이 아니라는 것과 [[이노익]] 교수가 의족을 한 남자로 첫 번째 결혼 때 남편의 다리를 보고 놀란 신부가 충격받고 도망갔던 사실을 김원주는 전혀 몰랐고, 뒤늦게 친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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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계몽운동과 강연, 논설 활동 ====
[[파일:나혜석 판화,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jpg|썸네일|180px|오른쪽|[[신여자]]지 1920년 4월호에 실린 나혜석 판화,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그해 그는 [[도쿄]]행 특급열차에서 우연히 [[일본인]] 청년 [[오오타 세이조]](太田淸長)와 만나 편지 서신을 주고받던 중, 깔끔하고 신사적이었던 그에게 끌려 훗날 그와도 사랑에 빠졌다. [[오오타 세이죠]]는 은행장의 아들로, 그의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명장이었으며, [[오오타 세이죠]]는 당시 [[규슈 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법대에 다니던 [[법학도]]였다.
 
[[1920년]] [[7월]]부터는 오상순, 염상섭, 김억, 황석우, 나혜석 등과 함께 순수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시, 소설, 수필 등을 발표했으나, 불온선전을 한다는 이유로 폐허지는 폐간되고 만다. 그해 말, 그는 직접 잡지 창간을 계획하였으나 [[3·1 운동]]의 여파로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1920년]] [[10월]] [[경성부|경성]] YMCA 청년회에서 여성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이후 각지를 다니며 사회 문제와 여성문제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그는 여자 교육의 필요성, [[참정권]]의 필요성, 여자의 사회 참여, 남자와의 동등한 지위 부여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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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자유연애론]]의 옹호자이기도 했다.<ref name="yops"/>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기존의 결혼 관습을 따라 정해진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에 반해, 김일엽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사람과 자유연애를 공표하며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로 스스로를 실험하였다.<ref name="yops"/> 보수적 [[유교]]사상가들과 남자 지식인들은 이러한 그의 자유 연애 역시 문란한 것으로 몰고 갔다.
 
[[1922년]] [[9월]] [[오오타 세이죠]]의 아들을 출산하여 [[오오타 마사오]]라 이름하였다. 아들 마사오의 한국명은 김태신으로, 그는 후일 화가, [[불교]]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오오타 세이죠]]는 유서깊은 명문가문이라 [[조선인]] 여성을 받아줄수 없다며 반대하였다. 김원주는 [[오오타 세이죠]]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아갔지만 세이죠의 부모는 결사반대하였다. 세이죠는 여러번 부모와 집안을 설득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가 [[일본인]] 남자와 연애하고 그 사이에 아들을 얻었던 것과 그가 고아 출신이란 점은, 그에게 반감을 가진 유교사상가, 남자 지식인들의 인신공격의 소재가 되었다.
 
===== 문필, 언론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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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일엽(一葉)이라 하면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舟)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간 고사에서 유래하지만 26세에 요절한 일본의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찌 이찌오]](一葉)가 1896년 사망하던 해에 김일엽이 태어났기 때문에 김일엽이 문학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 그 의미를 살려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인 것이다.<ref name="gyemong"/>
 
[[1923년]] 무렵 그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영화화하려다가 실패한다. [[1926년]] [[노라]]에 실린 김일엽의 발문을 보면 양백화와 함께 이 작품을 2~3년 전에 무대에 올리려 한 적이 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중단되었다고 말하였다.<ref>한국여성문학학회,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소명출판, 2008) 160~161페이지</ref>
 
그러나 자유연애로 사귄 남성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출산하는 등 개인적 문제로 고민하다가,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질타를 당하자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1933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1923년]] [[9월]] 충남 예산 수덕사에 갔다가 우연히 [[만공]]법사의 법문을 듣고 [[불교]]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는 후일 그가 불교로 귀의하는 계기가 된다.
 
그의 문학 특성은 예술성보다 주제에 비중을 둬 작품 자체는 큰 평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수도생활에서도 글쓰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평생의 업으로 여겼다. 이혼 직후, 일본 유학중에 만났던 [[규슈 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법대생 [[오오타 세이죠]]와 본격적으로 사귀면서 그들은 결혼하려고 했으나, 김원주가 조선인 출신에,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의 딸이란 점과, 장애인인 남편을 버렸다는 이유로 오오타의 집안에서는 극력 반대하였고, 김원주의 집안에서도 일본인과는 안 된다며 양가의 반대가 심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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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귀국, 다시 임노월과 동거에 들어갔다. 김일엽은 임노월의 개인주의 지향형 예술관인 '신개인주의적 예술지상주의'가 자신을 구제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임노월은 일찍 결혼을 하여 본처가 있었고, 얼마 뒤 김일엽은 임노월과도 헤어졌다. [[1923년]] [[9월]]에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 갔다가 우연히 승려 만공의 법문을 듣고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의 [[자유 연애론]]과 자유로운 연애는 보수적인 [[유교|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에 대해 김일엽은 개인의 연애와 애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 왜 타자들이 나의 연애 문제에 개입하려 드느냐며 항변하였다. 상당히 호탕한 편이었던 김일엽은 자신의 자유로운 연애가 [[유교|유학자]]들 본인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라면서, 스스로 '과거에 남한테 싫은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진저리가 났기 때문에 이젠 싫은 소리 더 듣기 싫다.<ref name="johon117">역사비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994) 117페이지</ref>'고 반박하였다.
 
그의 [[자유 연애론]]과 자유로운 연애는 보수적인 [[유교|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에 대해 김일엽은 개인의 연애와 애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 왜 타자들이 나의 연애 문제에 개입하려 드느냐며 항변하였다. 상당히 호탕한 편이었던 김일엽은 자신의 자유로운 연애가 [[유교|유학자]]들 본인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라면서, 스스로 '과거에 남한테 싫은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진저리가 났기 때문에 이젠 싫은 소리 더 듣기 싫다.<ref name="johon117">역사비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994) 117페이지</ref>'고 반박하였다.
 
[[1924년]] 《[[부녀지광]]》 창간호에 '우리의 이상'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유부남과의 연애나 애정관계를 옹호하였다. 기혼남성과의 교제를 정당시한 김일엽의 논의는 화제가 되었다.<ref name="gihho">정혜영, 《식민지기 문학과 근대성》 (소명출판, 2008) 140페이지</ref> 부녀지광 창간호에 게재된 우리의 이상이란 논설에서 김일엽은 기혼남성이 원래의 혼인관계를 청산, 이혼함을 전제로 한다면 미혼여성과 기혼남성과의 관계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서 규정하고 있다.<ref name="gih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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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중의 편견과 저항 =====
[[일본]] 유학을 보내준 대학교수 남편 이노익과의 이혼을 두고 [[성리학]]자들은 그가 의리없는 인간 또는 남편을 이용한 파렴치한 인물로 몰고 갔다. 또한 [[기독교]]계에서도 그의 이혼을 비판, 질타하였다. 김원주의 이혼에 대한 지탄과 비난에는 남자 지식인들도 가담했다. 그러나 김원주는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은 무의미한 것이며, 남편 또는 상대방에 대한 희롱에 불과하다며 맞받아쳤다.
 
남편과 이혼하기 전에 [[일본]]인 [[오오타 세이죠]]와 사귀고 그의 아이를 낳은 것도 비판과 인신공격의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김원주는 시중의 편견과 성리학자, 기독교인, 남자 지식인들의 비판에 저항하였다.
 
[[1922년]] 그는 '일체의 세욕(世慾)을 단하고'라는 글을 발표, "슬프고 아프던 때는 사라져 버렸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자유 연애를 옹호하는 한편 [[성리학]]자, 교인, 남자 지식인들의 편견에 저항한다. 그는 유학자와 교인들의 고루한 도덕관을 비판하였고, 논설과 반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와 편견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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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수덕사]] [[견성암]]에 가서 [[만공]]의 상좌가 되었다. 수덕사에 속한 유명한 비구니 암자 견성암으로 입산한 후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고 가르친 스승 만공(滿空) 선사의 뜻에 따라 절필한지 30여년이 지난 뒤에야 수상록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년), 《청춘을 불사르고》(1962년) 등 베스트셀러를 펴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ref name="seonmun"/>
 
[[1934년]] [[만공]]으로부터 하엽당 백련도엽 비구니(荷葉堂 白蓮道葉 比丘尼, 일엽이 연꽃처럼 되고, 그 성품 또한 백련과 같으니 도를 이루는 비구니가 되었도다)라는 당호(堂號)와 도호(道號)가 담긴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이때부터 [[불교]]명은 하엽, 도호는 하엽당, 백련도엽이라 하였다. 그 뒤 [[직지사]]에 머무르다가 서봉암, 마하연에 있다가 [[1935년]] [[경성부]] [[안국동]] [[불교여자선학원]]에서 수학하고 뒤에 다시 [[수덕사]]로 되돌아왔다. [[1936년]] [[오오타 세이죠]]는 아들 일당을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김원주를 찾아 결혼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원주가 이미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좌절, 아들을 당시 [[황해남도]] [[신천]]에 살던 친구 [[신도 아라키]]에게 양자로 보내 기르게 하였다. 아들 [[오오타 마사오]]는 14세 무렵 양어머니에게서 생모에 대한 소식을 듣고 [[수덕사]]로 찾아오게 된다.
 
승려가 된 뒤에도 [[나혜석]] 등과 꾸준히 연락하였다. 다른 여성운동가들은 그가 보다 강하게 저항하지 않음을 탓하였다. [[허정숙]]은 그가 현실을 도피할 목적으로 승려가 되었다며 비판하였다. [[나혜석]]은 그가 현실도피성 목적으로 승려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그와 가깝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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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혜석-Na Hye-seok.jpg|thumb|left|180px|친구이자 여성운동 동지인 [[나혜석]]]]
 
[[1935년]] [[정조취미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는 깨끗하기를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 성욕을 품는 남자들의 이중적인 성 관점을 비판하던 [[나혜석]]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수덕사]]를 찾아왔을 때 [[불교]] 승려로 출가하기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나혜석]]이 다시 찾아왔을 때는 그를 거절한다. [[1937년]] 여름 방학 때 아들 김태신은 그를 만나러 [[수덕사]]로 찾아가 처음으로 어머니라고 불렀으나 이미 일엽은 속세의 인연을 다 버린 승려였다. 일엽은 어머니라 부르지도 못하게 했고 마침 [[수덕여관]]에 와있던 나혜석과 함께 지냈다. 자식을 못 잊어 하던 나혜석은 그를 친아들처럼 대하고 그림을 가르치고 대화를 나누었다.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 자락을 찾아든 이유는 거기에 나이도 같은 동갑이고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32년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ref name="gyemong"/>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ref name="gyemong"/>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ref name="gyemong"/>
 
이때 [[나혜석]]은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글을쓰고 그림을 그렸다.
'중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중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ref name="gyemong"/> 이는 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며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었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 베게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ref name="gyemong"/> 처음에는 [[나혜석]]에게 [[승려]]가 되라고 권고했지만 이혼 고백서 발표 직후 전시회 등이 실패하자 찾아왔을 때는 안 된다고 하였다. 특히 [[나혜석]]이 자녀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본 일엽은 [[나혜석]]이 스님이 될수 없으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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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희생》(1928)
*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 영역, Jin Y. Park, trans. ''[http://www.uhpress.hawaii.edu/p-9126-9780824838782.aspx Reflections of a Zen Buddhist Nun: Essays by Zen Master Kim Iryo]p'' (2014)
*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
* 《청춘을 불사르고》(1962)
* 《사랑이 무엇이더뇨》(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