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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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 부모 = 아버지 김용겸, 어머니 이말대, 계모 한은총
| 배우자 = 이노익(1921년 이혼)
| 자녀 =
| 친척 = 동생 [[김진범]], 여동생 [[김진숙]]
| 장르 = 시, 소설, 수필
| 홈페이지 =
}}
'''김일엽'''(金一葉, [[1896년]] [[4월 28일]] ~ [[1971년]] [[2월 1일]])은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이자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며 시인 겸 수필가이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배려로 [[삼숭보통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뒤 [[1913년]]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8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日新女學敎)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다.<ref name="seonmun">[http://news.donga.com/3/all/20010129/7640914/1 <nowiki>[</nowiki>출판<nowiki>]</nowiki> 일엽스님 禪文集 다시 본다…30주기 맞아 재발간] 동아일보 2001.01.29</ref> [[일본]] 유학 중 문인으로 데뷔하여 시와 소설, 칼럼 등을 발표하였으며 귀국 후 [[1920년]]에는 [[폐허]] 지의 동인으로 참여하고, [[1920년]]에는 [[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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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안악군]]에 살던 과부 [[한은총]](韓恩寵)과 재혼하였다.<ref>정치인 정일형의 어머니이다.</ref> 한은총은 [[의병]]장 [[정원모]]의 아들인 정기찬(鄭基贊)의 아내였으나 남편과 시아버지가 연이어 죽자, 어린 아들 정신형을 데리고 그의 아버지인 김용겸과 재혼하였다. 이때 계모 한은총은 본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정일형]]과 [[정신형]]을 두었는데, 큰아들인 [[정일형]]은 두고 어린 아들 신형만 데리고 그의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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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2세 때에는 어린 동생이 죽고, 연이어 세 동생이 죽었다. 그 해 그는 순[[한글]]로 된 '[[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서 발표하였다. [[1913년]] 아버지 김용겸 마저 사망하여 김일엽은 외가에 가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밝고 명랑하게 생활했지만,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신여자]]지 창간호에 그의 단편논설 계시와 함께 실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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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삼숭여학교]]를 마치고, 같은 학교의 보습과(補習科)로 진학했다.
==== 이화학당, 이화여전 시절 ====
12세에 동생의 죽음으로 처음 큰 슬픔을 맛보기 시작, 이어서 세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다 잃고는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다. 가정 환경은 어려웠으나, 70 고령의 외할머니의 뒷바라지로 김원주는 학업을 계속하였다. [[1913년]] [[이화학당]] 중등부([[이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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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봄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에 입학하고, 동시에 [[도쿄 대학]] 영어준비학원에도 수강한 하였다. [[1918년]] 여름에 [[닛신여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18년]] 여름 [[미국]]유학파인 [[연희전문학교]] 화학 교사로 있는 40세의 [[이노익]]과 [[정동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 [[네브라스카 주|네브래스카]] [[웨슬리언 대학]] [[화학|화학과]]를 졸업한 [[이노익]]은 [[1915년]]부터 [[연희전문]]에서 [[화학]][[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이노익]]은 다리가 하나가 없는 [[장애인]]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ref name="gyemong">[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5003 수덕여관 손님, 나혜석과 김일엽] 오마이뉴스 2005.08.17</ref> [[이노익]](李魯益)은 당시 이혼남이었는데,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늙으신 외할머니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이노익]]과 결혼하여 빨리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훗날 회고록에서도
==== 일본 유학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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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에서 잡지 <[[여자계(]]女子界)>의 주간인 신여성 [[나혜석]]을 만났는데 [[나혜석]]은 그보다 6년 먼저 일본유학을 와서 1914년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라는 글로 유명해졌고 [[1917년]]부터는 [[일본]]의 [[조선인]] [[여자]] 유학생들의 잡지 <여자계>의 주간으로 있었다. 이때 김원주는 귀국 후 조선에서도 여성 잡지를 발행하겠다는 뜻을 품게 된다.
[[동경]] 유학 생활에서 [[일본]] 유학생이던 시인 노월 [[임장화]]를 만났다. 결국
==== 3.1 운동과 여성잡지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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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이후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도 친구 사이로서 공개적인 글을 주고 받는 등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유명해졌다.
이때 [[이광수]]는 그에게 일엽이라는
그는 남편 [[이노익]]의 적극적인 지원과 [[이화학당]] 시절 교수 중 그를 높이 평가한 빌링스 부인의 재정 후원으로 일엽은 여성종합잡지 [[신여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총각으로 알았던 남편 [[이노익]] 교수가 총각이 아니라는 것과 [[이노익]] 교수가 의족을 한 남자로 첫 번째 결혼 때 남편의 다리를 보고 놀란 신부가 충격받고 도망갔던 사실을 김원주는 전혀 몰랐고, 뒤늦게 친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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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계몽운동과 강연, 논설 활동 ====
[[파일:나혜석 판화,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jpg|썸네일|180px|오른쪽|[[신여자]]지 1920년 4월호에 실린 나혜석 판화,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1920년]] [[7월]]부터는 오상순, 염상섭, 김억, 황석우, 나혜석 등과 함께 순수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시, 소설, 수필 등을 발표했으나, 불온선전을 한다는 이유로 폐허지는 폐간되고 만다. 그해 말, 그는 직접 잡지 창간을 계획하였으나 [[3·1 운동]]의 여파로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1920년]] [[10월]] [[경성부|경성]] YMCA 청년회에서 여성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이후 각지를 다니며 사회 문제와 여성문제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그는 여자 교육의 필요성, [[참정권]]의 필요성, 여자의 사회 참여, 남자와의 동등한 지위 부여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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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자유연애론]]의 옹호자이기도 했다.<ref name="yops"/>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기존의 결혼 관습을 따라 정해진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에 반해, 김일엽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사람과 자유연애를 공표하며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로 스스로를 실험하였다.<ref name="yops"/> 보수적 [[유교]]사상가들과 남자 지식인들은 이러한 그의 자유 연애 역시 문란한 것으로 몰고 갔다.
===== 문필, 언론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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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일엽(一葉)이라 하면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舟)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간 고사에서 유래하지만 26세에 요절한 일본의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찌 이찌오]](一葉)가 1896년 사망하던 해에 김일엽이 태어났기 때문에 김일엽이 문학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 그 의미를 살려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인 것이다.<ref name="gyemong"/>
[[1923년]] 무렵 그는 [[입센]]의 [[인형의 집]]을 영화화하려다가 실패한다. [[1926년]] [[노라]]에 실린 김일엽의 발문을 보면 양백화와 함께 이 작품을 2~3년 전에 무대에 올리려 한 적이 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중단되었다고 말하였다.<ref>한국여성문학학회,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소명출판, 2008) 160~161페이지</ref>ㄹ
그의 문학 특성은 예술성보다 주제에 비중을 둬 작품 자체는 큰 평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수도생활에서도 글쓰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평생의 업으로 여겼다. 이혼 직후, 일본 유학중에 만났던 [[규슈 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법대생 [[오오타 세이죠]]와 본격적으로 사귀면서 그들은 결혼하려고 했으나, 김원주가 조선인 출신에,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의 딸이란 점과, 장애인인 남편을 버렸다는 이유로 오오타의 집안에서는 극력 반대하였고, 김원주의 집안에서도 일본인과는 안 된다며 양가의 반대가 심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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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귀국, 다시 임노월과 동거에 들어갔다. 김일엽은 임노월의 개인주의 지향형 예술관인 '신개인주의적 예술지상주의'가 자신을 구제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임노월은 일찍 결혼을 하여 본처가 있었고, 얼마 뒤 김일엽은 임노월과도 헤어졌다. [[1923년]] [[9월]]에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 갔다가 우연히 승려 만공의 법문을 듣고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의 [[자유 연애론]]과 자유로운 연애는 보수적인 [[유교|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에 대해 김일엽은 개인의 연애와 애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 왜 타자들이 나의 연애 문제에 개입하려 드느냐며 항변하였다. 상당히 호탕한 편이었던 김일엽은 자신의 자유로운 연애가 [[유교|유학자]]들 본인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라면서, 스스로 '과거에 남한테 싫은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진저리가 났기 때문에 이젠 싫은 소리 더 듣기 싫다.<ref name="johon117">역사비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994) 117페이지</ref>'고 반박하였다.
[[1924년]] 《[[부녀지광]]》 창간호에 '우리의 이상'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유부남과의 연애나 애정관계를 옹호하였다. 기혼남성과의 교제를 정당시한 김일엽의 논의는 화제가 되었다.<ref name="gihho">정혜영, 《식민지기 문학과 근대성》 (소명출판, 2008) 140페이지</ref> 부녀지광 창간호에 게재된 우리의 이상이란 논설에서 김일엽은 기혼남성이 원래의 혼인관계를 청산, 이혼함을 전제로 한다면 미혼여성과 기혼남성과의 관계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서 규정하고 있다.<ref name="gih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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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중의 편견과 저항 =====
[[일본]] 유학을 보내준 대학교수 남편 이노익과의 이혼을 두고 [[성리학]]자들은 그가 의리없는 인간 또는 남편을 이용한 파렴치한 인물로 몰고 갔다. 또한 [[기독교]]계에서도 그의 이혼을 비판, 질타하였다. 김원주의 이혼에 대한 지탄과 비난에는 남자 지식인들도 가담했다. 그러나 김원주는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은 무의미한 것이며, 남편 또는 상대방에 대한 희롱에 불과하다며 맞받아쳤다.
[[1922년]] 그는 '일체의 세욕(世慾)을 단하고'라는 글을 발표, "슬프고 아프던 때는 사라져 버렸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자유 연애를 옹호하는 한편 [[성리학]]자, 교인, 남자 지식인들의 편견에 저항한다. 그는 유학자와 교인들의 고루한 도덕관을 비판하였고, 논설과 반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와 편견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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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수덕사]] [[견성암]]에 가서 [[만공]]의 상좌가 되었다. 수덕사에 속한 유명한 비구니 암자 견성암으로 입산한 후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고 가르친 스승 만공(滿空) 선사의 뜻에 따라 절필한지 30여년이 지난 뒤에야 수상록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년), 《청춘을 불사르고》(1962년) 등 베스트셀러를 펴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ref name="seonmun"/>
[[1934년]] [[만공]]으로부터 하엽당 백련도엽 비구니(荷葉堂 白蓮道葉 比丘尼, 일엽이 연꽃처럼 되고, 그 성품 또한 백련과 같으니 도를 이루는 비구니가 되었도다)라는 당호(堂號)와 도호(道號)가 담긴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이때부터 [[불교]]명은 하엽, 도호는 하엽당, 백련도엽이라 하였다. 그 뒤 [[직지사]]에 머무르다가 서봉암, 마하연에 있다가 [[1935년]] [[경성부]] [[안국동]] [[불교여자선학원]]에서 수학하고 뒤에 다시 [[수덕사]]로 되돌아왔다.
승려가 된 뒤에도 [[나혜석]] 등과 꾸준히 연락하였다. 다른 여성운동가들은 그가 보다 강하게 저항하지 않음을 탓하였다. [[허정숙]]은 그가 현실을 도피할 목적으로 승려가 되었다며 비판하였다. [[나혜석]]은 그가 현실도피성 목적으로 승려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그와 가깝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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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혜석-Na Hye-seok.jpg|thumb|left|180px|친구이자 여성운동 동지인 [[나혜석]]]]
[[1935년]] [[정조취미론]]을 주장하고,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는 깨끗하기를 바라면서 남의 여자에게 성욕을 품는 남자들의 이중적인 성 관점을 비판하던 [[나혜석]]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수덕사]]를 찾아왔을 때 [[불교]] 승려로 출가하기를 권고하기도 했다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 자락을 찾아든 이유는 거기에 나이도 같은 동갑이고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32년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ref name="gyemong"/>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ref name="gyemong"/>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ref name="gyemong"/>
이때 [[나혜석]]은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글을쓰고 그림을 그렸다.
'중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중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ref name="gyemong"/> 이는 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며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었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 베게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ref name="gyemong"/> 처음에는 [[나혜석]]에게 [[승려]]가 되라고 권고했지만 이혼 고백서 발표 직후 전시회 등이 실패하자 찾아왔을 때는 안 된다고 하였다. 특히 [[나혜석]]이 자녀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본 일엽은 [[나혜석]]이 스님이 될수 없으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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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희생》(1928)
*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 영역, Jin Y. Park, trans. ''[http://www.uhpress.hawaii.edu/p-9126-9780824838782.aspx Reflections of a Zen Buddhist Nun: Essays by Zen Master Kim Iryo]p'' (2014)
* 《청춘을 불사르고》(1962)
* 《사랑이 무엇이더뇨》(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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