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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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수로 개척과 제방 축조가 타인의 토지인 부근 농지에 미치는 피해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토착 중국 농민들이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현(縣) 당국에 탄원·진정하여 공사 진행을 강제로 중지시켰다. 계약서 상에 분명히 현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일본의 대리인인 하오융더와 중국인 지주 간 계약이 무효가 되고, 한인 농민들의 개척작업 또한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소속 경관 6명이 이 공사를 강행하고, 일본 경찰 60명이 중국 농민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하여 이 수로공사는 [[1931년]] 6월 말에 준공되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중국 농민 약 400여 명이 [[7월 1일]]에 봉기하여 이 관개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써 현장에 있던
== 사건의 반향과 반중국인과 한국인 폭동 ==
[[파일:Chinese anti-Japanese poster published after the revenge by Koreans.jpg|thumb|350px|중국 포스터<br>''[[일본인|왜노]]가 [[조선인|선인]]을 참살시킨 [[중국인|우리 동포]]의 핏자국''(倭奴嗾使鮮人惨殺 我同胞之血痕) 1931년 7월|left]]
[[파일:Koreans under the protections of Japanese Police Station, being anxious of the Chinese revenge.jpg|thumb|300px|일본 경찰서에서 중국인의 보복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는 한국인. 1931년 7월]]
중국 국민당 정부측은 일본측의 대응에 강경하게 대항하였으나 일본은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매한 태도만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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