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버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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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버마는 당시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그러나 국경을 맞댄 [[영국령 인도 제국]]의 통치자인 [[영국]]은 호시탐탐 버마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820년대 초, 버마군은 영국령 인도와의 국경 근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로진압하러 갔다. 이 지역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인도로 도망가자, 버마군도 국경을 넘어 영국령 인도에 침범하였다. 이것은 침략 기회만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국에게는 큰 기회였다. 영토 침범을 이유로 영국은 즉각 버마에 군사를 출동시키고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순식간에 버마의 수도 [[양곤]]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버마의 장군 [[밴둘라]]가 전사하고 도시들은 파괴되었다. 승리자 영국은 미얀마의 주요 도시 [[아라칸]], [[아삼]] 등 주요 도시들을 빼앗았다. 하지만 영국의 야망을 사라질줄 몰랐고 1852년,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미얀마의 저지대]] 지방이 합병되었다. 그리고 1885년에는 미얀마무역회사가 반출량을 잘못 보고하여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일어났다. 마침내 [[미얀마의 고지대]] 지방까지 점령되면서 1886년 1월 1일 정식으로 미얀마를 합병하였다. 본격적인 영국령 버마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은 [[꼰바웅 왕조]]를 쫓아내고 군주제와 귀족 등 계급정책을 박탈하였으며 왕의 옥좌는 [[콜카타박물관]]로 가져갔다. 그러나 영국의 미얀마 지배는 조금 특이했다. 영국은 [[꺼인족]] 등 미얀마의 소수민족에게는 자치는 허용하여 간접통치를 하였지만, 미얀마의 다수족인 [[버마족]]에게는 직접 통치를 시행하였다. 안그래도 버마족과 소수민족은 사이가 안 좋은데 영국이 불난 집에 부채질한 셈이 된 것이다. 결국 이 것은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게다가 영국은 버마족보다 소수민족을 크게 우대하여 경찰, 군인, 관료, 중요한 인물 등 모두 소수민족이 차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국은 인도인의 미얀마 이주를 허용하여 1931년에는 미얀마 인구의 7%가 인도인이 될 정도로 늘었고 이들은 미얀마의 은행, 상점 등 경제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특히 수도 양곤은 3분의 2가 외국인으로 가득 찼고 그중 무려 53%가 인도인이였다. 영국은 미얀마를 통치하면서 버마족을 크게 차별했고, 전혀 사업화 시킬 의지가 없어서 계속 농촌국가로 유지하게 하였다. 이러한 판단으로 영국은 곡식 생산을 크게 권장하여 1905년에는 아시아 최대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1920년대, 아시아 전역에는 민족주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얀마에는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민족주의 운동은 오직 버마족을 위한 것이었다. 영국은 전혀 이 운동에 협조하지 않는 소수민족을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미얀마의 사정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파일:Aung San color portrait.jpg|300px|섬네일|default|미얀마의 독립지도자 아웅산]]
===일본의 점령과 아웅산의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