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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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 [[박은옥]](아내), 정새난슬(딸)
| 종교 = [[불교]]<ref>[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0938 불제자 마음에 키워야 할 ‘수행의 상징’]</ref>
| 장르 = [[포크 록|포크]]
| 직업 = [[가수]], 사회운동가
| 악기 = [[기타]]
| 활동시기 = [[1978년]] ~ 현재
| 레이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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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
===출생에서 가수 데뷔까지===
1954년 농사가 주업인 평범한 가정의 5남 3녀 중 일곱째로 [[경기도]] [[평택시|평택군]] [[팽성읍|팽성면]]에서 태어났다. [[평택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 매형이 기타를 구해와 어린 시절부터 기타를 가지고 놀았다. 악보를 몰라도 한 번 들은 노래는 곧바로 연주를 할 만큼 타고난 음악성은 주목을 받았다. [[평택중학교]]에 입학하자 그의 음악성을 눈여겨보았던 넷째 형의 권유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매형 집에서 클래식 음반을 들으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평택고등학교|평택고]] 2학년 때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이 되면서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담배를 몰래 피우는 등 동네 음악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정태춘은 이 시기에 접한 팝송과 1970년대 초반 [[김민기 (1951년)|김민기]]를 포함한 포크송 가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성에 낀 버스 창문에다 시조 등을 즉흥적으로 지어 쓰는 등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을 할 만한 실력은 없었다. [[1972년]] 서울대 음대에서 정식 레슨을 받으며 재수생활을 시작했지만 공부보다는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갖는 등 사춘기의 열병으로 방황했다. [[1972년]] [[10월 유신]] 발표 성명을 들으면서 재수 생활을 때려치우고 짐을 쌌다. 말도 없이 가출해 밀양의 목욕탕 보일러 화부로 일하다 셋째 형에 이끌려 고향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로 한동안 소일했다. 하지만 가시지 않은 열병 때문인지 삭발을 하거나 목포, 울릉도, 제주도로 가출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곡들은 대부분 방황하던 이 시기, 재수를 시작하면서 짓기 시작한 것들이다. 고향 마을의 풍경과 방황하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일기나 시를 쓰듯이 털어놓을 때 그는 행복을 느꼈다. 그를 고향에서 확실히 떠나게 한 것은 군입대였다. [[1975년]] 입대 후 인천부근 해안가와 고양경찰서 기동 타격대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기타도 없이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 등 많은 곡들을 썼다. [[1978년]] 6월 제대 후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고,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자작곡으로 데뷔음반을 냈다. 11월에 첫 음반이 나왔으니까 제대하자마자 출반을 한 셈이다. 음반을 준비하던 중 신인가수 [[박은옥]]과 만나 연애를 시작하였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수상했다.
===1980년 두 번째 음반 출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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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평택중학교 동문]]
[[분류:평택고등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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