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사 나리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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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사 나리마사는 [[삿사 나리무네]](佐々成宗)의 3남으로 태어났다. 삿사 나리마사는 형이 2명이 있지만 형들이 연달아 싸움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에이로쿠(永禄) 3년 [[1560년]]에 [[가독]]의 후계자로 히라성 성주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시종으로 들어간 삿사 나리마사는 [[우마마와리]](馬廻)로 활약하여 전공을 세우고, [[오다가오다 가문]] 무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여 오다군의 흑모의 무리의 장수가 되었다.
 
텐쇼(天正) 3년 [[1575년]] [[5월]]의 [[나가시노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노노무라 마사시게]](野々村正成), [[후쿠도미 히데카츠히데카쓰]](福富秀勝), [[반 나오마사]](塙直政)와 함께 철포대를 이끌었다. [[고부교|철포부교]](砲奉行)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정벌 이후 시바타 가쓰이에가 에치젠 영지를 받자 그곳의 한 군을 받아, 시바타 휘하에 소속되어 가가의 일향종과 싸움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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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겐신]]의 사망 이후 오다군이 엣츄를 점령하면서, 엣츄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텐쇼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혼노사 정변이정변]]이 일어났을 때, 호쿠리쿠 방면군은 우에스기 군의 마지막 거점인 엣츄 우오즈 성을 떨어뜨렸으나, 혼노사 정변이 각 장수한테 전해지자 장수들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기 때문에 우에스기군의 저지를 받게 되었고, 결국 [[시바타 가쓰이에]]의 몰락 원인이 된다.
 
삿사 나리마사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해, [[시즈가타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숙부인 [[삿사 헤이자에몬]](佐々平左衛門)를 지원군으로 보냈었다.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배한 이후, 마에다 도시이에의 배반과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압박으로 딸을 인질로 보내고 머리를 삭발하는 것으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텐쇼]]12년 [[1584년]], [[코마키ㆍ나카테루 전투]]가 일어나자 삿사 나리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으로 가담하지 않고, 여름 무렵이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쓰]] 측에 가담하였다. 그렇게 되어, 히데요시 측에 붙었던 [[마에다 도시이에]]와의 [[스에모리성 전투]]가 일어났고, 이 때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와도 관계가 나빴기 때문에 양쪽으로 공격을 당해 고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화의가 성립되자, 삿사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의 재기 독촉을 위해 히다 산맥을 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583년]], 히데요시가 10만 대군으로 토야마 성을 포위하였다. 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카쓰의노부카쓰]]의 중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히데요시의 조정으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자신의 영토인 엣츄국[[엣츄 국]] 동부의 니시카와 군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몰수당했다.
 
이후, [[규슈 정벌에정벌]]에 참가하여 히고국을[[히고 국]]을 받았으나, 히고의 호족들이 일제히 삿사의 정치에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할복 명령을 받게 되었다.
 
== 일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