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사 나리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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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삿사 나리마사는 [[삿사 나리무네]](佐々成宗)의 3남으로 태어났다. 삿사 나리마사는 형이 2명이 있지만 형들이 연달아 싸움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시종으로 들어간 삿사 나리마사는 [[우마마와리]](馬廻)로 활약하여 전공을 세우고, [[오다 가문]]의 무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여 오다군의 흑모의 무리의 장수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정벌 이후 시바타 가쓰이에가 [[에치젠 국|에치젠]] 영지를 받자 그곳의 한 군을 받아, 시바타 휘하에 소속되어
삿사 나리마사는 텐쇼(天正) 3년 에치첸 휴추 3만 3000석을 받아 에치첸 후츄를 다스린다. 이 때 삿사 나리마사와 함께 [[마에다 도시이에]], [[후와 미쓰하루]](不破光治)와 휴추 10만 석을 같이 받았지만, 후츄 10만 석을 받는 사람이 3명이였기에 3만 3000석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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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겐신]]의 사망 이후 오다군이 엣츄를 점령하면서, 엣츄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삿사 나리마사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해, [[시즈가타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숙부인 [[삿사 헤이자에몬]](佐々平左衛門)를 지원군으로 보냈었다.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배한 이후, 마에다 도시이에의 배반과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압박으로 딸을 인질로 보내고 머리를 삭발하는 것으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1583년]], 히데요시가 10만 대군으로 토야마 성을 포위하였다. 삿사 나리마사는
이후, [[규슈 정벌]]에 참가하여 [[히고 국]]을 받았으나, 히고의 호족들이 일제히 삿사의 정치에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할복 명령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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