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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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심유경 사후 4년에 걸친 강화 협상은 결국 물거품으로 끝났다. 심유경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한 번 더 침략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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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3|right|
이 때에 왜적의 기세가 날로 성해지자 명나라가 깊이 걱정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이 비밀히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였는데, 경영첨주유격(京營添住遊擊)이라고 가칭하고서 적정(賊情)을 탐지한다고 핑계하였다. 그러나 실지는 왜적의 군영으로 들어가 왜적과 상견하여 왜적을 꾀어 강화(講和)하려고 한 것이다. 유경 이 그 추종(騶從)을 간편하게 하고서 빨리 달려 강을 건너왔는데 언어가 장황하였다. 이날 [[의주]]에서 유숙하니 직제학 [[오억령]](吳億齡)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유경이 억령에게,
“내가 왜적의 내부로 들어가 의리로써 그들을 꾸짖기를 ‘ 조선 은 예의지방(禮義之邦)으로서 본시 죄과가 없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히 명분도 없이 병사를 출동시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죄 없는 백성들을 살륙하는가.’ 할 것이다. 왜적이 만약 듣지 않으면 또 ‘ 조선 은 중국 과 순치(脣齒)와 같은 나라이므로 너희들이 만약 철병하지 않으면 비단 [[산동]](山東)의 병사들만 다 출동시킬 뿐 아니라 천하의 병사들을 다 징발하여 너희들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여 기어이 물리치겠다.’고 하겠다.”
하였다. 그 사람은 모습은 보잘것없었으나 말은 잘하니 대체로 변사(辯士)였다. 그리고 [[평의지]](平義智) · [[평수길]](平秀吉)과도 서로 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권,<br />25년([[1592년]]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9일(정사) 6번째 기사|'왜적의 기세가 강해지자 중국은 '''심유경'''을 파견하여 강화를 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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