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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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했다. [[삼한시대]]에는 지금의 [[동래구|동래]]나 [[남구 (부산광역시)|남구]] 등지에는 "거칠산국"이, [[기장군|기장]], [[해운대구|해운대]] 등지에는 "장산국", "내산국"이 있었고 [[서면 (부산)|서면]]이나 [[남포동 (부산)|남포동]] 등지에는 "가락국" 등의 부족국가가 있었다. 그러다 [[삼국시대]] [[신라]]는 서기 [[1세기]] 후반인 [[탈해 이사금]] 때에 기장의 장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하게 된다.
 
부산포 일대에는 [[가야]]의 종발성이 세워져 [[신라]]와 [[가야]]의 각축장이 되었다. [[내물왕]] 대인 서기 400년경에 가야가 [[신라]]를 침공했다가 [[광개토왕광개토태왕]]의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패망하자 부산 전역이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옛 [[거칠산국]]은 거칠산군이 되고 종발성은 "큰 시루"라는 뜻의 대증현(大甑縣)이 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 [[경덕왕]]에 의한 행정개편으로 거칠산군은 [[양주]](현재 [[양산시]]) 소속의 동래군으로 개칭되었다. 대증현은 동평현(東平縣)으로 개명되어 기장현(機張縣)과 함께 동래군의 관할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격하되고 [[울주]]의 속현이 되며 동래군의 속현이던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속현이 되었다. [[1397년]] 동래군에 진이 설치되었다. 1405년 울주의 속현이었던 동래현이 독립현이 되고 양주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이 동래의 속현이 되었다. 15세기 전반까지 부산은 ‘부산포’로 불렸다. 동래는 1547년 동래도호부로 승격이 되었다. [[1592년]]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을 동래부 남촌면(현재 수영동)으로 옮겼다. 9월1일 이순신이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후에는 부산진이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