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uddlswnd102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
태그: m 모바일 앱 |
||
37번째 줄:
부산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했다. [[삼한시대]]에는 지금의 [[동래구|동래]]나 [[남구 (부산광역시)|남구]] 등지에는 "거칠산국"이, [[기장군|기장]], [[해운대구|해운대]] 등지에는 "장산국", "내산국"이 있었고 [[서면 (부산)|서면]]이나 [[남포동 (부산)|남포동]] 등지에는 "가락국" 등의 부족국가가 있었다. 그러다 [[삼국시대]] [[신라]]는 서기 [[1세기]] 후반인 [[탈해 이사금]] 때에 기장의 장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하게 된다.
부산포 일대에는 [[가야]]의 종발성이 세워져 [[신라]]와 [[가야]]의 각축장이 되었다. [[내물왕]] 대인 서기 400년경에 가야가 [[신라]]를 침공했다가 [[
[[고려시대]]인 [[1018년]]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격하되고 [[울주]]의 속현이 되며 동래군의 속현이던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속현이 되었다. [[1397년]] 동래군에 진이 설치되었다. 1405년 울주의 속현이었던 동래현이 독립현이 되고 양주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이 동래의 속현이 되었다. 15세기 전반까지 부산은 ‘부산포’로 불렸다. 동래는 1547년 동래도호부로 승격이 되었다. [[1592년]]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을 동래부 남촌면(현재 수영동)으로 옮겼다. 9월1일 이순신이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후에는 부산진이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로 활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