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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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진영에서는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대로 [[고정의]]가 고연수에게 말했다. "[[당 태종]]은,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쳐 없애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굴복시켜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이는 세상을 제도하라는 천명을 받은 인재이다. 지금 그가 전국의 군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이에 대적할 수는 없다. 나의 계책은, 군사를 정비하되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면서 기습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 때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때이다."
 
하지만 고연수는 이 말을 듣지않고 당군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3만여 군사를 잃고 포위되어 결국 [[고혜진]]과 함께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태종]]은태종은 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에 임명하였다.
 
그 뒤 [[안시성]] 전투에서 당군의 피해가 계속되자, 이때 고연수·[[고혜진]] 등이 당 [[당태종태종]]에게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자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빨리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어서 수비가 견실할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 그곳을 공격한다면,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는 승리할 것이며, 도중에 있는 여타의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그곳의 자재와 군량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양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안시성 대신 오골성을 직접 공격할 것을 주청하였다.
 
하지만 그 계책은 [[당나라]]의 [[장손무기]](長孫無忌)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뒤 당군과 같이 전장에 있었는데, 자신의 행동과 처지를 비관하다가 [[당나라]]로 돌아가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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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지휘권에 대한 의문 ==
 
또한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당시 주필산 전투의 총사령관이 고연수, 고혜진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이유는 당시 주필산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 15만명은 당시 고구려 인구 대비 및 각 지역에 이미 배치된 병력을 산정할 때 단일 전투로 동원된 병력으로는 고구려 및 이후 한민족 역사상 최대 규모에 가까우며 이정도 대부대를 총 지휘할 직급으로 당시 북부[[ 욕살]], 남부[[욕살]]이었던 욕살이었던 고연수나 고혜진으로 보기에는 너무 직급이 낮다고 판단된다. 고연수와 고혜진의 기록이 자세히 전해지는 이유는 당에 항복했기 때문이며, 항복하지 않았던 다른 고구려 측의 인명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주필산전투에 대한 기록이 당시 당나라측으 자료 구당서, 신당서 등에만 의존하고 있고 시기적으로 이어지는 안시성전투와의 과정에 공백이 있으며 이후 전투에 대해 구체적인 상황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사학자들은 북부[[욕살]] 고연수, 남부[[욕살]] 고혜진은 고구려 15만군의 선봉이었고 총사령관은 당시 사서에 등장하여 전략을 세웠던 대대로 [[고정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사서에 기록된 것 처럼 고정의는 대대로라는 높은 직급과 나이 많고 경험이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과거 고구려-수 전쟁 때도 참전한 경험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