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애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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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 책봉과 태후 ===
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고려 경종|경종]](景宗)의 비로 간택되어 입궐하였다. 입궐한지 얼마 되지않아서 회임을 하였고, 이때 경종은 무척 기뻐하였다고 한다. 당시 경종에게는 후사가 없어 고민거리 였기 때문이다. 회임과 동시에 헌애왕후는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헌숙왕후, 헌의왕후는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드디어 헌애왕후가 아들 목종을 낳았고
경종은 기뻐한다.
 
[[981년]] 남편인 [[고려 경종|경종]]이 죽자 당시 2살에 불과하던 헌애왕후의 아들 [[고려 목종|왕송]](王訟) 대신 그녀의 오빠인 황주원군 왕치(王治, [[고려 성종|성종]])가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태후가 되어 출궁, 천추궁(千秋宮)에 머물렀다. [[유교]]를 국교로 하려던 [[고려 성종|성종]]은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에게도 순결과 정조를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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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평가와 고려사 왜곡 가능성 ===
<고려사(高麗史)> 등의 사서(史書)에서는 헌애왕후를 김치양과 사통(私通)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당대의 관습을 무시하고 조선의 성리학적 사관(史觀)에 기초해 이루어진 왜곡된 평가라는 비판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학(儒學)의 정치이념을 강조했던 성종(成宗)에 맞서 전통사상을 강조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등 북진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女傑)로 재평가하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학(儒學)은 사대주의, 전통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