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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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 또는 '''나가추'''({{한자|納哈出|납합출}}, ? ~ [[1388년]])은 [[북원]](北元)의 장군이다. 나하추는 본래 [[징기스칸]]의 [[사준사구|사준]] 중 한 명인 [[무칼리]]의 후예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랴오둥 반도|요동]] 지방의 군 지휘관을 역임했다. [[원나라|원]](元) 말기가 되자 스스로를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으로 칭하고, [[만주]]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다. 원이 몽골 고원으로 쫓겨나 북원이 된 이후에도 북원의 대칸 [[아유시리다르]]는 계속 [[명나라|명]]을 압박하였는데, 이를 위해 만주 잘라이르의 나하추와 협력하였다.
 
[[고려 공민왕|공민왕]] 11년인 [[1362년]]의 2월, 나하추는 [[고려]]가 수복한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기 위해,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함경남도]] [[홍원군|홍원 지방]])으로 쳐들어갔다쳐들어 갔다. 이에 고려 정부에서는조정은 [[조선 태조|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시|함흥]] 평야에서 나하추의 군대는 대패하였다. 이 때문에,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이 완전완벽히 몰락했다.<BR />
이 전투 후 그는나하추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waa_000041&grp=&aid=&sid=15479073&pos=0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7장 B면, 【영인본】 1책 4면]</ref><BR />
[[1372년]] 명군의 보급 기지였던 우가장을 기습해 명의 5000명의병력 병력을5000명을 죽이고 10만석의 양곡 피해를10만 석을 입혔다피해했다.<ref name="Ming_Yodong_GongMinKing">{{cite web|url=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2991.html|title=명-북원 세다툼 틈타 ‘요동정벌’ 칼 빼든 공민왕|publisher=한겨레|author=한명기|accessdate=}}</ref><BR />
[[1386년]] 12월, 명 태조 [[주원장]]이 장군 풍승에게 요동 공격에 나서라는나서라고 지시를 내리자,지시하자 명군은 오늘날의 승덕 부근에 병참기지를 설치한 뒤, 1387년 6월 나하추를 공격하여 금산(金山) 지역을 장악했다.<ref name="Ming_Yodong_GongMinKing" /> 이런 상황에 기근까지 발생하자 나하추는 명에 투항하여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졌다.<ref>명사(明史) 본기(本紀) 태조(太祖) 홍무(洪武) 20년(1387) 9월 무인(戊寅)일, 나하추가 수도에 당도하자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였다. (九月戊寅,納哈出至京,封為海西侯)</ref><BR />
[[1388년]], [[윈난 성|운남]] 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