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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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그데부르크의 약탈(Sack of Magdeburg) ==
구스타브 아돌프가 그의 군대와 함께 [[메클렌부르크]](Mecklenburg)에 상륙한 후 [[베를린]]에 머물면서 북부 독일의 제후들을 자신의 동맹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요한 체르클라에스는 [[엘베 강]] 근처에 위치한 중부 독일의 도시이며, 스웨덴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마그데부르크]]를 공략하였다. 공성전은 [[1631년]] [[3월 20일]] 시작되었으며, 자신은 다른 곳에서 전역을 벌이고 있는 동안 지휘권을 [[파펜하임|고트프리트 하인리히 그라프 추 파펜하임]](Gottfried Heinrich Graf zu Pappenheim)에게 맡겼다. 두 달간 공성전이 이어졌고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오데르]](Oder)가 스웨덴에게 함락된 후에야, 파펜하임은 지원병을 이끌고 온 틸리를 설득하여 [[5월 20일]] 파펜하임이 직접 지휘하는 40,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도시에 대한 강습을 시도하였다. 돌격은 성공하였고, 성문은 돌파되었으나 장군들은 병사들에병사들을 대한 통제권을통제하지 상실하였다않았다. 시민들에 대한 살육이 벌어져 25,000명에서 30,000명 정도의 시민들이 병사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고,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요한 체르클라에스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사건이었다. 틸리가 이 사건에 얼마 만큼 책임이 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틸리의 적들은 빠르게 틸리를 비난하고 나섰으며, 이 [[학살]]이 틸리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프로테스탄트 측은 이 사건을 빌미로 상대방에 대한 비슷한 학살을 저질렀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틸리가 이 학살을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마그데부르크는 엘베 강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이고 점점 증대되고 있는 스웨덴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중간보급기지로서 반드시 필요한 지역이었다. 틸리는 매우 경험이 많은 무장이었고, 이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덧붙여 틸리는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기 전 임시 보루를 함락시킨 후에 마그데부르크에 항복을 제안하는 사신을 보냈었다. 이는 틸리가 도시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보다는 도시를 제압하는 데 더 흥미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이런 폭력이 어느 정도 흔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근시안적인 탐욕으로 가득 찬 용병부대는 때때로 군율을 어기고 약탈을 자행하곤 했다.
 
== 스웨덴에 대항한 전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