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마자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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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zarin-mignard.jpg|thumb|쥘 마자랭]]
'''쥘 마자랭''' ({{llang|fr|Jules Mazarin}}, {{llang|it|Giulio Mazarino|줄리오 마차리노}}, [[1602년]] [[6월 14일]] ~ [[1661년]] [[3월 9일]]) 은 이탈리아 출신의 [[추기경]], 정치가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수상을 지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탈리아]] [[페시나]](당시의 [[나폴리 왕국]])에서 출생하여, 로마의 예수회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라 사피엔자 대학에서 법학박사를 받았다. 1628년 만토바 계승전쟁에 종군,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교황 우르바노 8세]]로부터 [[교황 특사]]로 임명, 어려운 종전 처리의 임무를 받게 된다. 마자랭은 스페인과 프랑스군간의 화해를 이끌어 내어 1631년 4월 차라스코의 화의를 성사시키며, 이로써 프랑스측, 특히 당시 수상이었던 [[리슐리외]]의 호감을 사게 된다. 리슐리외는 마자랭을 파리로 불러 왕의 초상화가 담긴 금줄과 예도를 하사하고, 마자랭은 아비뇽의 교황 부 특사와 프랑스 [[교황 대사]]를 거쳐 [[1639년]]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루이 13세]]와 [[리슐리외]]의 신임을 얻어 그가 죽은 1642년, 프랑스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리슐리외 정책을 계승하여 교묘한 외교 수완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을 유리하게 끝내어 [[합스부르크 가]]를 눌렀다. 내정에 있어서는 [[부르봉 왕조]] 확립에 노력하였기 때문에, 이 정책에 반대한 귀족·고등 법원은 파리를 중심으로, [[1648년]]부터 [[1653년]]까지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진압하고, 봉건 세력을 억압, 절대주의 강화에 성공하였다. 한편 [[1651년]] [[프랑스]] [[황태후|왕태후]] [[안 도트리슈]]에게 [[프랑스]] [[섭정]] 직위를 이양받아 [[1661년]] 죽을 때까지 [[루이 14세]]의 [[섭정]]을 맡았다.
 
그는 루이 14세를 등에 없고 개신교인들을 탄압했다. 위그노에 대한 관용을 담은 낭트칙령을 무효화 시키는 퐁텐블로 칙령을 반포해 개신교를 탄압했다. 또 1665년 6월 20일 선언으로 개종을 했다가 다시 개종하는 자칭 개혁종교인들과 가톨릭교를 버리는 가톨릭교도들에게 추방형을 선언했다.<ref>김충현《루이 14세 시대(1661~1678)위그노에 대한 종교적 강요》</ref>
 
또 [[라인 동맹]]을 체결하여 독일에 세력을 뻗치고, 영국과 동맹하여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에 대항, [[피레네 조약]]을 승인하게 하고, 에스파냐 왕녀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마리아 테레사]]와 [[루이 14세]]의 결혼을 성립케 하였다. 문예의 보호에도 노력하고, 프랑스 최초의 공공 도서관인 [[마자랭 도서관]]를 창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