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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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의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세기에 [[예수]]가 승천하고 나서 그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갈릴래아]]에서 태어난 어부 출신으로, [[사도 베드로|베드로]]라고 알려진 시몬이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고 [[기독교]] 설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사도 바오로라고 알려진 [[사도 바오로|타르수스의 바오로]]는 자신의 선교 여행과 여러 지역 교회를 훈계하고 격려한 내용을 담은 많은 서신을 썼는데, 이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퍼져 나가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성 바오로가 로마로 선교하러 떠났다는 것도 여기에 적혀 있다. 오래된 전승에 따라 성 베드로도 성 바오로처럼 로마로 길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믿어진다.
 
[[파일:Rome basilica st peter 011c.jpg|thumb|upright|대성당 안에 있는 성 베드로 청동상]]
 
베드로라는 이름은 [[라틴어]]로는 “페트루스(Petrus)”이며 [[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Petros)”인데, 그리스어로 “돌” 또는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에서 기인한 말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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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고자 했던<ref name=BF>Banister Fletcher, ''The History of Architecture on the Comparative Method''</ref> 율리오 2세는 설계 공모를 시행했는데, 이 공모의 출품작들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아직도 남아 있다. 최종적으로 [[브라만테]]의 설계안이 선정되어 1506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이는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설계안으로 건물의 돔은 로마의 신전인 [[판테온 (로마)|판테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ref name=BF/> 브라만테의 설계안과 판테온의 큰 차이점은 연속적으로 벽이 지지하는 판테온의 돔에 반해, 새 대성당은 네 개의 커다란 기둥으로만 지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최종 설계안까지 유지되었다. 브라만테의 돔 위에는 작은 돔이 있는 정탑(頂塔)이 놓였는데, 이 정탑은 초기 르네상스 건물인 [[피렌체 대성당]]의 브루넬레스키의 돔 위에 [[미켈로초]]가 설계한 정탑과 그 형태가 매우 비슷하다.<ref name=Hartt/>
 
브라만테는 중앙부의 돔을 사선 축으로 다섯 개의 낮은 돔들이 둘러싸도록 설계했다. 성단소, 중랑, 익랑은 모두 후진에서 끝나는 두 공간 구획이 있었다. 건물의 각 귀퉁이에는 탑이 세워져, 전체적인 평면은 후진들이 동서남북의 기본 방위를 가리키는 정사각형이 되었다. 각각의 후진들은 두 개의 거대한 방사선상의 반원 형태를 취한 부벽(扶壁)을 갖고 있었다.<ref>Bramante's plan, Helen Gardner p.458</ref>
 
율리오 교황이 1513년에 선종하자, 브라만테의 자리는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로 교체되었다.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는 둘 다 1515년에 사망하였고, 브라만테는 그 전년도에 사망하였다. 중랑에 다섯 개의 공간 구획을 만들고, 복잡한 후진들이 한 열로 된 경당을 측랑 바깥의 양쪽 면에 설치하는 등 라파엘로의 설계안에 이르러 큰 변화가 일어났다. 라파엘로의 성단소와 익랑 설계도에는 탑들의 크기를 줄이는 것을 통해 외부 벽들을 더욱 명확하게 함으로써 완벽한 정방형 형태가 되었고, 반원의 후진들은 복도로 에워싸여 더욱 명확하게 경계가 한정되었다.<ref>Raphael's plan, Banister Fletcher p.72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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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간 작업은 조금밖에 진척되지 못했으나, 미켈란젤로는 앞서 건축가들의 발상들을 간단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지어질 위대한 건물을 위해 그는 이 발상들을 참고하였다. 무엇보다도,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원래 설계안이 가진 본질적 가치를 인식했다. 바로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돌아간 것이었다. 헬렌 가드너는 “브라만테의 계획안에서의 중심성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미켈란젤로가 펜으로 그은 몇 개의 필치는 복잡성을 단단하고 응집력 있는 통일성으로 전환했다.”라고 평가했다.<ref name=Gardner>Helen Gardner, ''Art through the Ages''</ref>
 
지금도 남아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은 [[카를로 마데르노]]가 중랑을 확장한 것이다. 성단소의 끝(성당의 동쪽 끝)과 거대한 중앙에 배치된 돔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바티칸 시국]] 내에서의 돔의 위치와 광장 앞에서 건물을 보았을 때에 네이브가 돔을 가리는 것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멀리서 보았을 때에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브라만테의 광장 계획안에서 분명히 정의된 기하학적 형태와, 반원형의 광장을 만들려던 라파엘로의 계획안을 상당히 축소해 버렸다는 것이다.<ref>Michelangelo's plan, Helen Gardner p.478</ref> 미켈란젤로는 외부에 상당한 비례의 석조 건축물을 만들고 각 모퉁이에 제의실과 계단통을 둠으로써 기하학적 분명함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각도에서 보았을 때에 연속하는 벽 표면이 접히거나 부러진 것으로 보이게 되었으나, 건물의 모퉁이에서 방향이 바뀌는 것을 알려주는 직각 형태는 부족해졌다. 외부는 조금씩 서로 다른 각도로 배치된 거대한 코린트식 열주의 벽기둥으로 둘러싸였는데, 벽의 표면에서 계속해서 바뀌는 각도를 따라가게 된다. 이 벽기둥들 위에는 연속하는 띠 장식에 굴곡이 있는 거대한 벽돌림띠가 압축된 상태에 있는 전체 건축물을 둘러싼다는 인상을 준다. <ref name=Mignacca>Eneide Mignacca, ''Michelangelo and the architecture of St. Peter's Basilica'', lecture, Sydney University, (1982)</ref>
 
=== 돔- 성공적인 도안과 최종 해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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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만테와 상갈로 ====
[[파일:St peter large.jpg|thumb|250px|돔에서 내려다 본 브라만테가 세운 거대한 교각과 미켈란젤로가 세운 후진 끝.]]
지름이 43.3m인 [[판테온 (로마)|판테온]]의 돔(19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돔이었음)은 단 하나의 문을 제외한 어떤 출입구나 창문도 없는 원통형의 벽 위에 지지가 되어 있다. 판테온의 높이는 판테온의 지름과 같다. 판테온의 돔은 [[콘크리트]]로 된 한 겹의 외피로 건설되었는데, 콘크리트에는 화산암과 석회화, 부석을 많은 비율로 함유하여 무게를 줄였다. 돔 내부의 표면은 깊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수직·수평으로 살을 만드는 효과를 내어, 전체 하중을 줄이는 효과를 낳았다. 돔의 최고점에는 지름 8m의 눈 모양의 개구부가 있어 건물 내부로 빛을 끌어들인다.<ref name=BF/>
 
브라만테의 대성당의 돔 계획안은 이러한 판테온의 돔을 본받아 매우 흡사하였는데, 그가 재발견한 제조 방식으로 만들어진 석회화로 된 콘크리트로 지은 돔이었다. 돔 위에 있는 정탑을 제외하면 두 돔의 윤곽은 매우 흡사하며, 또한 판테온의 지지벽은 대성당에서는 지면에서 네 개의 육중한 기둥 위에 올려진 원통으로 바뀌었다. 판테온에서 쓰였던 것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의 단단한 벽은 브라만테가 벽에 창문들을 뚫고 늘어선 기둥들로 벽을 둘러싸게 하여 가벼워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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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돔의 초기 도면들과 상세 도면을 포함한 얼마 안 되는 수의 도면을 남겼다. 또한, 1569년 스테판 뒤 페라크의 작품인 상세한 판화가 출판되었는데, 그는 여기에 미켈란젤로의 최종 설계안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였다. 전임자였던 상갈로처럼 미켈란젤로 역시 목재로 된 건물의 큰 모형을 만들었다. 자코모 델라 포르타는 이 모형을 여러 방법으로 고쳐 보고, 여기서 그가 만든 변경사항을 설계안에 적용하였다. 변경사항 대부분은 표면적인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식스토 5세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돔의 원통형 부분의 위에 있는 꽃 장식 위에 사자 머리를 추가한다거나, 정탑의 꼭대기에 상갈로가 이전에 제안한 것과 같은 장식 고리를 추가하는 것 등이었다. 델라 포르타나 미켈란젤로가 건물 모형에 만든 주된 변화는 안쪽의 돔 위로 높이 바깥쪽 돔을 올리는 것이었다.<ref name=JL-M/>
 
미켈란젤로가 그린 도면에는 반구 형태가 아닌 그의 초기 발상이 나타난 달걀 형태의 돔이 그려져 있다.<ref name=Gardner/> 판화에는 반구형의 돔이 그려져 있으나, 아마 이는 판화가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나무 모형의 윤곽은 판화의 것에 비하면 달걀 형태에 가까우나, 완성된 돔에 비하면 덜 가깝다. 미켈란젤로가 임종할 무렵 돔을 더욱 뾰족한 형태로 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제임스 리스밀른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변동사항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고, 교황 식스토 5세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그가 수용할 수 있는 과학적 이해가 부족하다고 보았다고 언급했다.<ref name=JL-M/>
 
헬렌 가드너는 미켈란젤로가 둥글게 늘어선 거대한 벽기둥들의 동적인 수직적 요소와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안정된 돔의 균형을 맞추려고 아랫부분의 반구형 돔을 수정했을 것이라고 시사했다. 가드너는 또한 “(미켈란젤로에 의해) 건축물의 조각은 중층을 두어 땅에서 위로 확장하고 원통형 벽과 그 위에 있는 돔으로 나아가, 전체 건물은 기반부에서 최고점까지 단일한 개체로 함께 통합된다.”라고 언급했다.<ref name=Gard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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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 ====
[[파일: 0 Coupole - Basilique St-Pierre - Vatican (2).JPG|thumb|upright|돔 공사는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가 시작해 끝마쳤다.]]
자코모 델라 포르타와 폰타나는 [[교황 식스토 5세]]의 치세 마지막인 1590년에 대성당의 중앙 돔을 완공하였다. 새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는 폰타나가 채광창을 완성한 것을 보고 식스토 5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명각을 돔 안쪽 틈에 새기도록 하였다. 다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대성당 안에 십자가를 세운 날을 기념하고자 온종일 축제를 벌이고, 모든 도시의 성당들에게 종을 울리라고 명령하였다. 십자가의 양팔 부분은 두 개의 납 용기로, 한쪽에는 [[성십자가]]의 파편과 [[성 안드레아]]의 유골이 들어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거룩한 양의 원형 초상화를 담고 있다.
 
18세기 중반, 돔에 균열이 생기자 붕괴를 막고자 두 외관 사이에 네 개의 쇠사슬을 고리처럼 설치하였다. 여러 시대에 걸쳐 열 개의 쇠사슬이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최초는 미켈란젤로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에 한 예방조치처럼 고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돔 내부 둘레에는 2m(6.5ft5&nbsp;ft) 짜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인용문2|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
<center>(“…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 복음서|마태오]] 16,18-19.)</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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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의 의자와 성체 경당 ====
[[파일:Cathedrapetri+gloria.jpg|thumb|250px|베르니니의 “베드로의 의자”와 “영광”]]
베드로의 의자(Cathedra Petri)는 중앙 제대 뒤쪽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 5세기경 상아로 장식된 의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베르니니를 시켜 그 의자 위를 무게가 약 75,000kg에 달하는 청동으로 입히고 장식을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의자의 네 다리를 무게 39,000kg000&nbsp;kg, 높이 4~5m의 청동상들이 잡고 있는데, 앞의 두 명은 서방 교회의 [[교부]]들인 [[암브로시우스|성 암브로시오]]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성 아우구스티노]]이며, 뒤쪽으로는 동방 교회의 교부들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아타나시우스|성 아타나시오]]이다. 의자를 받치는 네 인물 형상들은 망토를 펄럭이며 경배와 환희의 감정을 표현하는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의자 위쪽을 보면 천연대리석을 얇게 깎아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의 창 안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하늘에서 비치는 빛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비둘기 날개의 폭은 1.75m에 달한다. 그리고 이 창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뜻한다. 그리고 타원형의 둥근 모양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 까닭은 [[삼위일체]]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비둘기 주위는 구름에 둘러싸인 천사들이 에워싸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 초로의 화가인 [[안드레아 사키]]는 베르니니가 이 형상들을 크게 만들도록 설득했으며, 그리하여 네이브의 중앙 입구로 들어섰을 때 이 작품들이 뚜렷하게 보이게 되었다. 베드로의 의자는 1666년 1월 16일 성대한 의식을 통해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 마지막 작업은 1676년에 맡은 성체 경당의 장식이다. 그는 [[성체]]를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서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를 축소한 형태를 한 경당을 도금한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이 작은 경당은 성 베드로가 순교한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양쪽에는 천사상들이 있는데 한 천사는 경외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경배하고 있으며 다른 천사는 감상자를 향해 환영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베르니니는 1680년에 82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f name=J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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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주석각주|2}}
 
==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