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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모스크바 탈취를 소련 침공 후 3-4달 이내로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파죽지세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진격은 소련군의 저항 때문에 늦쳐줬다. 게다가 히틀러는 자원과 식량이 모여 있는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 공략을 모스크바보다 우선순위에 둘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래서 중앙집단군이 전격전의 핵심전력인 예하의 구데리안 기갑군을 [[키예프]] 공략을 위해 [[독일 남부집단군|남부집단군]]으로 전속시켜 전력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집단군이 맡은 스몰렌스크 공략작전은 7월부터 9월까지 지속되어 2달간 모스크바 공략작전이 늦어졌다. 키예프와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킨 이후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던 기갑부대의 재정비때문에 독일군의 공세는 일단 레닌그라드와 키예프에 이르는 전선에서 정지하였고, 모스크바 진격은 9월 30일이 되어야 재개되었다. 이 작전은 [[태풍 작전]]({{lang|en|Unternehmen Teifun}})으로 명명되었다. 이 작전의 목표는 겨울까지 모스크바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작전이 재개된 직후, 소련군의 수 개 야전군을 포위섬멸한 독일군은 모스크바 서쪽 120km120 km 근방의 [[모자이스크 방위선]]에서 일단 정지되었다. 도로와 들판을 진흙창으로 만든 [[라스푸티챠]] 때문에 추축군의 차량과 인마는 전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을 장마가 끝난후 찾아온 추위는 땅을 얼어붙게 만들어 독일군은 전진을 재개할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이제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추위와 강화된 소련군의 저항과 다시 한번 맞닥뜨려 험난한 길을 나서게 되었다.
 
12월 초, 독일군의 첨병부대는 모스크바의 심장부이자 소련의 정부청사인 [[크레믈린]]에서 30km30 km 서쪽까지 진출하여 쌍안경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추위와 약화된 전력때문에 더이상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12월 5일, 소련군은 시베리아에 주둔했던 전력완비의 사단들을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하여 독일군을 공격했다. 1942년 1월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을 100km까지 후퇴시켜 모스크바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였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소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이는 소련이 처음으로 독일의 공세를 좌절시켜 수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투는 쌍방의 인명손실이 100만명을 넘는 참혹한 결과를 내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최대 규모의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일군이 1939년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패퇴한 전투로 독일군 역사상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독일군은 1941년 9월의 [[옐르냐 공세]]와 [[로스토프 공방전]]에서 패퇴하게 되지만(이 패퇴때문에 남방집단군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룬트슈테트]]는 해임되었다), 이 전투들은 모스크바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다.
 
독일군을 맞는 소련군은 3개 전선군이었는데, 이 부대들은 지난 몇 개월동안 격전에서 소진된 야전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스크바 방위군의 전력은 총 1,250,000명의 병력, 1,000대의 전차, 7,600 문의 야포 및 677대의 항공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양적으로는 독일군에게 의미있는 위협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부대가 단일방위선을 구성하도록 부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는데다가, 후방에는 거의 예비병력이 없었다.<ref name="MosEnc" /> 바실레프스키는 회고록에서 소련의 즉각적인 방위전력은 잘 준비되고 있었지만, 이러한 배치의 오류때문에 독일군이 초반전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밝혔다.<ref>Vasilevsky, p.139</ref> 더욱이 소련군의 대부분은 전투경험이 부족했고, 대전차장비와 같은 결정적 무기가 부족했으며 소련군의 전차들은 구식이었다.<ref name="GlantzVAB">Glantz, chapter 6, sub-ch. "Viaz'ma and Briansk", p.74 and following.</ref>
 
소련군 지휘부는 시주위에 확장된 방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르제프-뱌지마 방위선]]이 [[르제프]] ~ [[뱌지마]] ~ [[브랸스크]] 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두 번째로 [[칼리닌]]과 [[칼루가]] 사이에 [[모자이스크]] 이중 방위선이 구축되었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 주위에 3중 방위환이 구축되어 모스크바 방위구역을 이루었다. 그러나 작전초기에는 아직도 독일군의 신속한 진격때문에 아직도 방어 준비는 대체로 불완전하였다.<ref name="MosEnc" /> 더욱이, 독일군의 공격계획이 늦게 파악되어 9월 27일이 되어야 소련군 부대에 완전 방위태세의 명령이 하달되었다.<ref name="MosEnc" /> 그러나, [[볼가 강]] 유역, 아시아, 우랄에서 새로운 소련군 사단들이 창설되고 있었고 이러한 사단들을 짧은시간안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모스크바 방위전은 시간을 다투는 경주로 만들었다.<ref>Vasilevsky, p. 138</ref>
 
=== 뱌지마-브랸스크 포위 ===
브랸스크 남방에서는 소련의 초기 대응이 뱌지마 방면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독일 제2기갑군은 전진하는 제2군과 함께 모든 전선을 포위하는 기동을 하여 10월 3일 [[오룔]], 10월 6일 브랸스크 를 점령하였다. 소련군 제3, 제13군은 포위되었지만 또다시 항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집단으로 나뉘어 포위망을 탈출, 포니리와 므쩬스크 근방의 인접 방위선까지 후퇴하였다. [[10월 23일]]까지 마지막 남은 부대가 포위망에서 탈출하였다.<ref name="MosEnc" />
 
10월 7일까지 이 방면에 대한 독일의 공세는 주춤해졌다. 첫눈이 내린후 녹아서 도로를 러시아어로 "[[라스푸티챠]]"로 불리는 진흙뻘로 만들었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진격이 현저히 늦주어졌고, 사람과 전차를 탈진시켜 이른 기동을 할 수 없었다.<ref>Guderian, p.316</ref> 므쩬스크 근방에서 [[독일 4 기갑사단|독일군 4기갑사단]]은 렐류센코와 카투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 새로 생산된 [[T-34]] 전차가 독일군 전차부대가 앞을 지날때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들은 보병의 엄호부대와 함께 독일군 [[4호 전차]] 대열의 양 측면을 물어뜯었다. 독일군에게 있어서 이 패배는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수뇌부는 특별조사를 명령했다.<ref name="GlantzVAB" /> 절망적이게도 구데리안과 그의 부대는 새로운 T-34가 대부분의 독일 전차포에 끄떡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데리안이 썼듯이, "우리 4호 전차의 짧은 75mm 전차포는 후부엔진을 명중시켰을때만 T-34를 격파할 수 있었다".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러시아인은 이미 몇가지를 배웠다."고 썼다.<ref>Guderian, p.318</ref> 다른곳에서도, 소련군의 대규의 반격이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다.
 
[[파일:Schlamm1941.jpg|250px|right|thumb|1941년 진흙뻘로 변한 소련도로.]]
11월15일, 독일 기갑군은 클린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스탈린의 볼론콜람스크 방면의 반격명령을 위해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소련군의 예비병력이 없었다. 독일군의 초기공세는 이 전선군을 양분하여 소련군 16군과 30군을 분단시켰다.<ref name="GlantzTTG" /> 며칠간 계속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적은 피해에도 아랑곳없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위해 정면공격을 행했다."고 밝혔다.<ref name="Zhukov28">Zhukov, tome 2, p.28</ref> 독일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중방어선은 소련군의 피해를 감소시켜 16군은 천천히 후퇴했고 방위선을 돌파하려는 독일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독일 제3기갑군은 격전끝에 11월 24일 클린, 그리고 다음날 솔네츠네고르스크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의 저항은 아직 강했고, 전투의 향방은 아직 알수 없었다. 후에 알려진대로,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모스크바가 성공적으로 방위될 수 있는지 공산당원답게 솔직히 이야기하라고 물었다. 주코프는 가능하지만, 예비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대답했다.<ref name="Zhukov28" /> 11월 28일까지 독일 제7기갑사단은 최후의 주된 장애물의 하나인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고 클레믈린으로부터 35km35&nbsp;km 근방까지 와 있었다.<ref name="GlantzTTG" /> 그러나 소련 제1돌격군의 강한 반격을 받고 운하를 건너 후퇴했다.<ref name="Zhukov30">Zhukov, tome 2, p.30</ref> 모스크바의 북서쪽 방면의 독일군은 크라스나야폴랴나에 도달했다.<ref>Guderian, p.345</ref> 독일군 장교들은 망원경으로 소련 수도의 주요건물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 독일 양군은 모두 심하게 소모되어 어떤때는 일개 여단이 150명에서 200명의 소총수만을 보유하기도 했다. (일개 중대의 정원과 비슷했다) <ref name="GlantzTTG" />
 
툴라 근방의 남쪽에서는, 11월 18일 제2기갑군이 공세를 재개하여 시를 포위하려 시도하였다.<ref name="GlantzTTG" /> 그러나 이 공세를 맡은 독일군은 지난 전투에서 심하게 손상을 입었고 아직까지도 동계의복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초기공세는 일일 5-10km5–10&nbsp;km 정도밖에 전진하지 못했고, 구데리안의 표현대로 성공의 기회는 불확실해져가고 있었다.<ref>Guderian, p.340</ref> 더욱이, 소련군 49군, 50군이 툴라 근방에서 독일 전차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더욱더 진격 속도를 늦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데리안은 전광석화같은 공세를 계속할 수 있었고, 11월 22일에는 스탈리노고르스키를 점령하고 소련군 일개 보병사단을 포위했다. 11월 26일 독일 전차부대는 모스크바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경유하는 카쉬라에 접근했다. 이에 대응하여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이 다음날 행해졌다. 몇 개의 보병여단과 전차집단이 지원하는 벨로프 지휘의 기병군단이 독일군을 카쉬라 근처에서 정지시켰다.<ref>A.P. Belov, ''Moscow is behind us'', Moscow, Voenizdat, 1963, p.97.</ref> 독일군은 12월 초에 시의 남쪽 출구만을 확보한채 뒤로 물러섰다.<ref>Belov, p.106</ref> 툴라 자체는 방어진지에 포진한 결연한 군인과 민간인들에 의해 사수되었다. 남쪽에서는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근접하지 못했다.
 
모스크바 북방과 남방의 저항때문에 12월 1일 독일군은 나로포민스크 근방에서 민스크-모스크바 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에 대한 정면공격을 행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한정된 전차 지원하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방위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소련 제1 친위자동차화보병사단의 완강한 저항과 33군의 측면공격을 받아서 독일군은 1만명의 손실과 수십대의 전차를 잃고 4일후 후퇴했다.<ref>Zhukov, tome 2, p.32</ref>
 
== 쌍방 손실 ==
모스크바 공방전중의 독일군과 소련군의 손실은 각기 여러자료들의 다른 추정치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들이 모스크바 공방전의 기간 설정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전투의 시작을 1941년 9월 30일(때때로 10월 2일)의 태풍작전 개시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공방전의 종료일에 대해서 두가지 다른 설이 있다. 특히 에릭슨같은 사람 <ref name="Erickson">John Erickson, ''Barbarossa: The Axis and the Allies'', table 12.4</ref> 과 글란츠는 <ref name="GlantzB">Glantz, Table B</ref> 는 르제프 공세를 이 전투의 범위에서 빼서, 1942년 1월 7일을 종료일로 잡아 사상자 수를 적게 계산하였다. 르제프와 뱌지마 작전을 작전의 범위에 넣은 역사가들은 좀 더 사상자수를 높게 추산한다.<ref name="MosEnc" /><ref name="GSEMoscow" /> 르제프 작전이 1942년 1월 8일 시작되어 이전의 전투들로부터 휴지기 없이 전투가 계속되었으므로 이런 태도는 이해될 만하다.
 
여러 자료에 따른 사상자의 수치도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에릭슨은 그의 책 "바르바로사(Barbarossa: The Axis and the Allies)"에서 1941년 10월과 1942년 1월 사이에 소련군은 653,924 명의 인명손실을 냈다고 밝혔다.<ref name="Erickson" /> 글란츠는 그의 책 "거인들의 대결"에서, 방위 국면에서만 658,279 명의 손실을 냈고 1월 7일의 동계반격에서 370,955 명의 손실을 더 냈다고 서술했다.<ref name="GlantzB" /> 1973-1978년에 출판된 소련대백과사전에서는 1942년 1월까지 400,000명의 독일군 손실을 기록했다.<ref name="GSEMoscow" /> 또다른 추정으로는 1997년에 출판된 "모스크바 백과사전"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방위국면에서 145,000명의 독일군과 900,000명의 소련군 손실을, 그리고 1월 7일까지의 반격에서 103,000명의 독일군과 380,000명의 소련군 손실을 기록했다.<ref name="MosEnc" /> 그러므로 1941년 9월 30일부터 1942년 1월 7일까지의 총손실은 독일군 248,000 명에서 400,000명 (GSE / Moscow encyclopedia estimate) 소련군 650,000명에서 1,280,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Erickson / Moscow encyclopedia estimate).
 
== 주석 ==
{{주석각주|3}}
 
==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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